존경을 받는 자

 

 

 

[사도행전 5장 33-42절 말씀 묵상]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러시모어 산에는 '큰 바위 얼굴'이라는 명소가 있습니다. 18m의 거대한 암벽에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즈벨트 등 미국 사람들이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최근에도 여론조사가 있었습 니다. "만약 당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러시모어산에 새로 새긴다면 누구의 얼굴을 새로 새기 고 싶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이 뽑은 인물가운데 1위는 마틴루터 킹 목사입니다. 미국은 해마다 설문 조사를 통해서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합니다. 지금까지 부동의 1위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다음으로는 에이브러헴 링컨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는 예수님 다음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허리우드 스타나 인기 가수가 아닌 흑인 인권 운동가를 존경하는 인물로 뽑았습니다.” 왜 그를 뽑았을까요? 그 이유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미국은 더 좋은 세상, 더 밟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인터넷). 큰 바위 얼굴에 새겨진 것은 대통령이라는 직위 때문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 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서 어떤 자리에 있던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노예가 아닙니다. 자진해서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큰 바 위 얼굴입니다. 권위 있고 존경받는 큰 사람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국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적 믿음에, 불교적 인 사고방식에, 유교적인 습관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 …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임에 틀림 이 없다. … 이 세 부분이 혼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전통적인 문화에서 누리고 있는 최대의 축복이 있다. 그것은 교인들로부터 최 대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랑 상관이 없다.  때론 인격과 도 상관이 없다. 즉 목사라는 타이틀에 대한 존경심과 더 나아가 경외심은 그 어떤 나라에 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존경심이라 생각한다”(인터넷). 그런데 이제 목회자를 향한 존경심은 추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사람 됨됨과 예수님을 닮아 기지 못하는 인격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들, 전임 목사님과 후임 목사 님 간에 갈등들, 전임 목사님 편에 서있는 성도들과 후임 목사님 편에 서 있는 성도들 간의 갈등들, 이러한 갈등들에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 목회자들, 과연 성도들로부터 특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34절을 보면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인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나옵니다. 또한 41-42절에서는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나 성도들이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하는 이 시대에 과연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33-42절 말씀 중심으로 한 세 가지로 생각해 보며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존경받는 자는 조심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35절을 보십시오: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사도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너 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30절)라고까지 말씀하였을 때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사 두개인들 (17절)과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21절)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 자”(33절)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게 노하여”란 말은 “마음에 찢기어”라고 번연되어야 합 니다(박윤선). 흥미로운 대조적인 모습은 사도행전 2장37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떤 자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하였던 반면에,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도리어 ‘마음에 찢기어’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박윤선). 그 때에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교 법사 가말리엘이 공회 중에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에 명하고 산헤드린 공회원들 에게 사도들에게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34-35절). 여기서 가말리 엘은 유대의 유전 작성으로 저명한 힐렐(Hillel)의 손자요, 바울의 스승입니다(22:3). 그는 “교법사”, 즉 율법 해석자로서 그가 별세했을 때에 (예루살렘 성전 멸망 18년 전)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율법의 영광이 떠났고 깨끗함과 거룩함이 죽었다”고 애석하였습니다(박윤선). “그는 바리새인들 중 힐렐 학파의 창시자인 힐렐의 후손으로 장로 가말리엘 1세로 후대에 알려졌습니다(유상섭).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뜻 아닌 운동은 스스로 무너진다고 말하면서 역사상 실례로 두 가지 메시아 운동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운동을 일으킨 두 장본인은 드 다와 갈릴리 사람 유다였습니다(36-37절).   하나님의 운동이 아니었던 드다 운동은 드다 자 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였지만(36절)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망 할 수밖에 없었음을 명확하게 해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갈릴리 유다란 인물을 들었는 데 이 사람 또한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망하여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런 후 가말리엘은 공의회원들에게 사도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고 권면하였습니다(38절). 그 이유는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 로서 났으면 무너지겠지만 만일 하나님께 로 서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8-39절).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존경받는 받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조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묵상한바 사도행전 4장 27절에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이빙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동하여 예수님을 거슬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무리를 지어 함께 예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이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시기에 가득 찬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은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을 대적하였습니다(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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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중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30절)라는 말씀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크게 노하게 만들었습 니다. 자기들의 양심(마음)을 찌르는 일이기에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까지 했던 것입니다 (33절).
  • 성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인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 라(32절)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을 대적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은 시기가 가득한 가운데서 성령 하나님을 거슬러 성령 충만한 사도들과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대적했습니다.

 

존경받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 님을 대적할까봐 조심하는 자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는 함부로 하나님의 종들들 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존경받는 자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40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가 말리엘의 말을 듣고서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사도들을 죽이지는 못하고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풀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 늘 본문 40절에서 “저희가 옳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NIV 영어성경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가말리엘의 연설에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과연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크게 노하 는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을 어떻게 설득하였습니까?

 

  • 그는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을 설득했습니다. 다시 말하 면, 가말리엘은 크게 노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에게 같은 감정을 통하여 설득시킨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드다와 유다의 사건의 예를 들어 설득을 시켰습니다.

 

  • 가말리엘은 성경적 논리로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을 설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38-3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 로서 났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성경적 논리를 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서 난 ‘부흥 운동’이라면 식어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난 진정한 ‘부흥 운동’이라면 우리가 막을 수 없습니다.

 

  • 가말리엘은 그의 인격으로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을 설득했습니다. 위의 첫 번 째와 두 번째 설득 방법들은 설득을 하려고 하는 자의 인격에 결합이 있던지 사람들에게 평 판이 좋지 않으면 그 만큼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모든 백성 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인격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말은 더욱더 설득력이 있었습니 다.

 

불레인 리의 “지도력의 원칙”(THE Power Principle)을 보면 “존경받아야 영향력 얻는다”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인터넷): “블레인 리는 미래형 리더십의 조건으로 존경심 을 든다.   그는 '진정한 지도력이란 계략과 술책, 협상과 위협이 아니라 존경심에 바탕을 둔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21세기형 리더십, 미래의 부 등 요즘 서구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를, 경영학과 조직학의 관점에 의거 분석하고 있다.” 우리 그 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가말리엘처럼 우리 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존경 받기는커녕 우리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디도서 2장7-8절 말을 들어야 합니다: “범사에 네 자 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 라.” 우리의 선행의 본을 보이며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 의 삶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삶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어떠한 삶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때 로마서 4장 2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 구절에도 ‘설득’이라는 단어가 나 와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우리가 다 른 성도들이던 세상 사람들이던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설 득을 충분히 당해야 합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처럼(롬 4:18) 우리 또한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설득 을 당하여 믿음의 삶을 신실하게 산다면 우리의 삶은 그 만큼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이 있습 니다.  복음은 오늘날 전도자들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전도하고 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전도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

 

마지막 셋째로, 존경받는 자는 삶에 모범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5장 41-42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 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충고를 듣고 설득을 당한 후 사도들을 공회로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 습니다. 그 때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 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 그런 후 여전히 이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는지 집에 있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며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얻는 교훈은 존경받는 자는 삶에 모범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과 연 사도들은 어떠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살아야 할 모범된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해야 합니 .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합니까? 예수님 믿고 행복해지면 기뻐합니까? 예 수님을 잘 섬겨서 물질의 복을 받으면 기뻐합니까? 자녀가 잘 되면 기뻐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한다면 예수님의 고난의 동참하는 것으로 기뻐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26절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 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이 없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모범된 삶에는 고난이 없는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살아드려야 할 모범된 삶은 날마다 어디에 있던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쉬고 세상일에 쉼이 없이 뛰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에 쉬고 무슨 일에 쉬지 말아야 하는지를 혼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크리스천이라면 그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들어납니다. 그의 삶과 입술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들어내는 삶이야 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범된 삶이 아닐 수 없 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 몇 분이 계십니다. 그중 “헨리 나우웬”이란 신부님이 계십니 다. 저는 그의 글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글들과 더불 어 섬김의 삶을 책으로나마 조금 보게 되면서 제 삶(영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 나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의 삶의 뒷모습이 저에게 큰 영 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마음 품고 걷고자 힘쓰고 있 습니다. 저 또한 저희 집 세 자녀들에게 이러한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조심하는 아버 지, 삶의 모범으로 설득력을 가진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내나 자녀들이나 교회 성도들이나 형제, 자매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고 싶습니 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존경심을 얻는 모범된 삶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