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삶

 

 

 

[사도행전 4장 32-37절 말씀 묵상]

 

 

흔히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들 합니다: 꼭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없 으면 좋을 사람. 어찌 이 세 종류로 한정지을 수가 있겠습니까만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 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하여, 세상 에 사랑을 주기 위하여, 세상에 나눔을 주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로 인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 다울까요?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쳐보십시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인터 넷). 예수님의 나눔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이해인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 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 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 든 것 내어 주고도 한 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인터넷).   “나눔 은 소유의 많음에 있기보다 존재의 넉넉함에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 내면의 충만을 누리 는 자만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눔은 물질의 과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 입니다. 나눔은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습니다. 주 고 또 주고도 줄 것이 남는 연인들의 마음처럼,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 음입니다. 나눔은 생명의 원리입니다. 나눔은 희생으로 시작되지만 풍성함으로 열매를 맺 습니다. 기쁨은 나눌 때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 때 그 슬픔이 절감이 됩니다. 깊은 샘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올라오듯이, 우리의 삶은 나눔으로 더 풍성해집니 다”(인터넷).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2-37절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나눔의 삶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개 교회 성도들은 일심으로 기도한 가운데 성령 충만하여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32절)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제목을 “나눔의 삶”이라고 잡고 나눔의 삶에 대해서 한 3가지 교훈을 오늘 본문에서 받아 실천해 옮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나눔의 삶에는 나눔의 삶에는 한 마음과 한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2절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의 동지들이(23절) 일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결과(24절) 하나님의 임 재 가운데 성령 충만하여 모든 심령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 라(31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재물 공유의 생활을 하였습니다(32절). 이것 은 사유 재산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재산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서 교회로 하여금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유상섭). 이 본문 4장에서의 재물 공유의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묵상한 사도행전 2 장42-47절 말씀을 상기키십니다. 아주 유사한 상황이 초대교회에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 다. 이것을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재물 공유 생활이 결코 일시적으로 한번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속 지속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3천명의 성도들의 재물 공유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에 오늘 본문 32절 말씀 은 사도행전 4장 4절에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약 남자만 오천 명의 성도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 누가는 여기 32절에서 “믿는 무리”란 말은 과거 시제 로 사용한 것입니다(유상섭).

 

이것은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남자만 약 5천명 이나 되는 숫자가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일어난 이 성 령의 역사 말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3천명 그리고 4장에서는 남자만 약 5천명, 합치 면 약 8천명이 넘는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재물 공유 생활을 했다는 것, 이것 우 리가 볼 때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가 100명도 안 되는 교회 안에서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지 못하고 있는데 약 8천명이나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저는 그 답을 에베소서 4장에서 찾아보았 습니다. 특히 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 때 교회가 하나 된 이유는, “그들이 다 함께 영원히 구원 받기 원하는 한 가지 소원만 가졌던 까닭이 고, 다 함께 성령의 위로를 체험한 까닭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엡4:1). 우리는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엡4:4). 그 “한 소망”이 과연 무엇 입니까? 찬송가 539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적혀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한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의 피와 의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음, 한 뜻을 품기 위한 우리 사람들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저 는 그 대답을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찾아봅니다(참고: 빌2:2):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다 ‘화평케 하는 자’ 들 (peacemakers)이 돼야 합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18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들 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또한 마태복음 4장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들의 나눔의 삶에는 한 마음 한 뜻이 있습니다. 그 한 마음과 한 뜻은 오직 주님의 마음 이요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마음과 다른 뜻은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나눔의 삶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결코 두 마음을 품고 내 뜻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려는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아니 될 것입 니다.

 

둘째로, 나눔의 삶에는 필 절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4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필 절한 사람이 없었습니까?  그 이유는 서로가 필 요를 따라 나눠주기 때문입니다(35절). 약 남자만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 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제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재물 공유의 삶을 살았습 니다(34-35절). 그런데 과연 이들이 어떻게 재물 공유를 했는지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4-35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즉, 그들 중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이 재산을 처분하여 사 도들의 발 앞에 두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34-35절). 이 말은 교인들이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그들 가운데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자발적으로 팔아서 궁핍한 성도들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는 성도들이 계속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유상섭).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어떻게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한 두 가지 제안을 말씀에 비추어 하고자 합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필요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람은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궁핍한 가운데 있으면 팔이 안으로 굽어져 우리 자신의 필요성만을 보게 되는 본능이 있습니다(영어로 “self-absorbed”, 즉, 자기 일에만 몰두 하 게 되는 것임). 그러나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그 본능을 뛰어 넘어 자기 자신의 필 요한 것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필요한 것을 봅니다.

 

  • 우리는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줘야 합니다. 여기서 나눠줌에 있어서 좀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는 한에서 나눠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빛을 져가면서까지 형제의 필요를 도와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은 빚을 지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또한 우리는 필요한 형제에게 나눠줌에 있어서 함께 나눠주면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혼자 저 한 사람을 돕기보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함께 뭉쳐서 서로 물질을 기증해서 모아서 함께 필요한 형제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눠줌에 있어서 교회를 통하여 나눠주는 게 좋습니다. 즉, 약 5천명의 남자들이 서로 재 물을 공유할 때에 나눠줌에 있어서 물질이 있는 자들이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35절) 둔 것을 보면 교회 안에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겠지만 함께 구제 헌금 같은 것을 해서 교회를 통하여 그 형제를 돕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필 절한 성도가 없을 정도로 나눌 수 있 었습니까? 그 답을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3절에서 찾아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큰 권능”과 “큰 은혜”로 가능합니 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큰 능력으로 증거한 결과 큰 은혜가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있 었기에 그들은 서로 나눠주므로 필 절한 성도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만일 오늘 부족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권능이 나타나므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지금 선포되고 있다면 큰 은혜를 받는 성도님들은 나누는 삶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할 것이며 또한 실 행으로 옮겨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나눔의 삶에는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36절을 보십시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 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 활을 큰 권능으로 선포하므로 “무리가 큰 은혜를” 얻은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기증한 가운데 오늘 본문 36절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여 구호금을 교회에 바친 그 많은 사람 들 중에 구체적인 예로 요셉이라는 인물을 저자 누가는 들고 있습니다. 그는 37절을 보면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요셉 이란 사람은 우리에게 바나바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권위자”(Son of Encouragement)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 이였습니다.

 

나눔의 공동체 안에는 바나바처럼 위로 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위로 받기보다 오 히려 남을 더 위로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진정한 나눔의 삶이 있습니다. 나 눔의 삶이 있는 공동체 안에는 화평케 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필 절한 사람이 없고 오히려 위로 자들이 있습니다. 위로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며,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인생은 때론, 고통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 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덜기 위하여 고민 하지만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해결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여 절 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위로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위로하는 것은 고통을 가져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 "당 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 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위 로를 주고받는 것이고 그것이 위로입니다. 우리는 모두 위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 들입니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기 위해서 애쓰십시오. 당신의 시간들이 더욱 풍족해지고, 생활의 풍족한 만족이 은은한 향기처럼 당신의 영혼을 채울 것입니다”(인터넷).

 

 

 

“나누는 것이 돌보는 것입니다”를 배워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마음으로 필 절한 사람을 위로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