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난 할 말이 없게 하라!

 

 

 

[사도행전 4장 3-22절 말씀 묵상]

 

 

세상을 향해 던지는 금자씨 왈, “ 너나 잘하세요!”[송용덕 칼럼]를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는 더 막강한 말로 세상의 입을 다물게 했 다. 13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한 금자씨, 그 앞에 교회 목사님은 두부를 들고 나타난다.  교회 봉사자 밴드의 연주 속에 미소를 머금은 목사님은 아마 이런 말이 금자씨 의 입에서 나오기 기대했을 것이다.  ‘목사님, 너무 고마워요. 제가 13년간 지옥 같은 교도 소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다 목사님 덕분입니다. 앞으로 깊은 신앙생 활과 함께 고통 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겠습니다.’ 이 한 글자도 버릴 것이 없는 ‘주옥같은 말’을 말이다. 하지만 금자씨는 ‘낮은 목소리로 임하소서’처럼 차분한 톤으로 이렇게 짧은 말을 목사님께, 아니 세상에게 던졌다. “너나 잘하세요!.” 이 말을 인용하여 써진 글이 “크리스찬  투데이” (2006.1.12.) “시사칼럼”에 실린  글을 보았습니다. 글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 교회들이나 잘하세요”.   물론 “친절한 금자씨”라 는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인 “너나 잘하세요!”를 생각하면서 써진 글이지만 왠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칼럼을 쓴 시민교회 안찬수 목사님은 교회가 세상의 소금의 역활을 감당함에 있어서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좋은 맛을 내는 것, 즉 ‘복음 전하는 선교 와 전도’인데 이것은 온 힘을 모아 기량을 보이며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 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소금의 기능인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부패방지의 에너지인 정직과 성실한 모습에 있어서는 미약하고 무 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나(당신이나) 잘하세요!”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다시 말하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말 문히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힐난할 말이 없 게 하라!”는 제목아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힐난할 말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16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 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나으면서 앉은뱅인 된 자가 걷게 된 일로 종교 지도자들은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5절) 사 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질문했었을 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고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이 때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 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말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한 3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박윤선): 첫째로,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13절).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 학교도 다닌 것도 아니고 랍 비 교육도 못 받았기에 연설을 잘 할 줄 예상을 못했기에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베드로의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절). 다시 말하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지도 아래 있었던 사실이 저들로 하여 금 저렇게 변론을 담대히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셋째로, 병 나은 사람 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14절). 이적의 확실한 증거인 나면서 앉은 뱅이 된 자가 지금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 있으므로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할 말이 없었 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이적이 이모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유명한 표적 이 되었는데 어떻게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부인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만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또 어디 있습니까?

 

美 13년전 사형수 DNA검사 결과 `유죄'란 기사를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13년전 처형되는 순간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사형수인 로저 콜맨의 무죄 여부를 가 리기 위해 실시된 DNA검사 결과, 당시 유죄판결은 옳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콜 맨은 1981년 처제인 완다 맥코이(당시 19세)가 탄광마을인 그룬디의 자신의 집에서 강간당 한 뒤 흉기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범인으로 지목돼 1982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92년 5월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도 무죄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DNA검사를 명령했던 미 국 버지니아주의 마크 워너 주지사 대변인은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해 분석한 증거물의 DNA가 범인의 것과 일치했으며 “무작위로 뽑힌 다른 사람의 DNA가 증거물과 일치할 확률 은 1천900만분의 1”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1981년 당시 19세의 처제를 강 간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 된 콜맨의 무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 가라앉게 됐다고 합니다. 만일 이번 검사에서 콜맨의 무죄가 입증됐을 경우, 형이 집 행된 사형수가 무죄로 판명되는 첫 번째 사례가 돼 미국 내 사형폐지 여론이 폭발하는 계기 가 될 것으로 관측돼왔다고 합니다.   DNA Test를 법정 증거로 사용하려면: DNA 테스트 결 과는 99.99 % 의 정확도로 법정의 증거로 사용이 가능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기사를 읽 고 나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DNA와 같은 확실한 증거가 무엇 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 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드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힐날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한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적 DNA인 예수 그 리스도의 삶을 살아드리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힐난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예로 사도행전 2장13절을 보면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한 120문도를 향하여 세 상 사람들은 조롱하였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술 취하면 불신자들에 게 힐난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볼 때에 할 말이 없게 만 들어야 합니다. 성경 디도서 2장 7-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 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부지런히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힐난할 말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2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치유를 받은 사건이 예루 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기에(16절)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 한에 대하여 말 문히 막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 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 게도 말하지 말고(17절) 가르치지도 말라(18절)고 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의 대 답은 이것이였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 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   만일 이러한 위 협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숨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핍박은 없 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의 증인 이라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외부의 위협으로 그 진리를 숨긴다면 양심에 가책은 충 분히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숨기며 살아가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심 이 가책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리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진 리를 말해야 한다는 저항할 수 없는 마음과 열정(compelling spirit)이 결핍돼 있습니다. 박 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리를 위협으로 막아보려는 행동은 가장 어리석다. 진리를 위협을 받을수록 더욱 전파된다. …  진리와 사실대로 움직인 양심은 제재할 수 없 다. 누구든지 자기 양심이 진리대로 움직임을 제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기 관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살과 같은 무서운 악이며, 그 결과는 멸망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진리를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위협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을 목격한 그들로서 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은 이러한 위협에 저항할 수 없는 복음 열정이 있었습니까? 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들은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살았습니다. 사람 앞에서 살아가 는 사람은 사람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참 신 앙인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기에 사람의 위협에 타협을 하지 않습 니다.

 

  •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에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더 속히 하였습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훈련이 요구되는 신앙의 삶 입니다. 사람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는 사람의 음성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찬양으로 고백해야 하니 이 얼마나 어려운 일 입니까.

 

  • 들은 바른 판단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엇이 옳고 틀린 것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는 바른 판단력이 길러집니다. 그 러므로 그 판단력 속에서 옳은 결정을 내립니다.

 

  • 그들은 용기가 있었습니다. 용기가 있었기에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위협 속에서 도 굴복하지 않고 증인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의지는 진정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막는 위협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진리를 거슬러 살아가지 않고 오직 진리와 함께 살면서 진리와 함께 죽을 각오도 할 수 있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켜 우리는 증인 혹은 목격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훈택 총신대학교 교수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처음 교회를 지도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고 그의 활동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던 예수의 실제 제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격자들 혹은 증인이란 이름으로 구별되었다”(인터넷). 실재로 누가복음 1장2절을 보면 “말씀의 목격자”란 말씀이 있습니다.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을 쓰면서 지금 말씀의 목격자들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진술의 신뢰성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목격자들의 진술은 법정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러므로 작가들은 자신의 진 술의 신뢰성을 위해 목격자들의 사실 확인을 최고의 검증으로 활용했습니다(인터넷). 바로 우리가 말씀의 목격자들입니다. 비록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 고 그의 음성을 귀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안으로 보고 영의 귀로 듣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 혹은 목격자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격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목격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 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힐난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힐난할 말 이 있다면 그 원인 중 하나는 말씀의 목격자가 아닌데 목격자인 것처럼 언행을 일삼기 때문 일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힐난할 말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21절을 보십시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 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 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백성을 두려워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면서 40년간(22절) 앉은뱅이 된 자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이 표적을 예루살렘에 사는 모 든 백성에게 알려졌으므로(16절) 그 백성들이 목격한 사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 로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은 위협한 후 놓아 주었 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목격하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오히려 이 사건을 은폐해 버리려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은 목격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 기서 우리는 누가 힐난을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대중을 두려워하 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에게 위협 외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었는데 결국 이들은 백성들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힐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표적에 대한 백성들의 올바른 반응인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 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취한 종교 지도자 들의 어두움의 일이 들춰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힐난할 말을 듣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저는 마태복음 5장 16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 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빛의 자녀들로서 빛 되신 예수님의 빛을 비 취는 삶을 우리의 착한 행실로 들어내면 살아간다면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백성들 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행하신 주님의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세 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베 드로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 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 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부인 할 수 없는 증거로 세움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