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묵상]

 

 

이슬람 성지 순례 때 “마귀 돌기둥”이란 곳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나 340여명 숨지 고 1000여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마귀 돌기둥”이란 무엇입니까? 전 세계에서 몰 려든 무슬림들이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순례하는 연례 종교행사(하 지)가 8일 본격 시작됐었는데 이 메카 순례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밝히는 신앙 증언과 하루 5차례의 예배, 종교세납부, 라마단(이슬람력 9월) 금식과 더불어 건강과 재정형편이 허락하 는 무슬림이 실천해야 할 의무로 꼽힙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태어나 고 알라의 집으로 불리는 하람 사원이 있는 메카에 몰려든 순례자들은 며칠 전부터 메카 인 근의 미나 평원 텐트촌에 모여 기도와 명상을 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순례를 준비합니다. 순례자들은 10일 메카로 돌아오는 길에 49개의 돌멩이를 미나 계곡의 돌산에 세워진 3개의 마귀돌기둥을 향해 한 번에 7개씩 "악마여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던지는 의식을 치릅니다. 이 의식은 돌기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례자들의 몸싸움을 유발해 집단압사 사고 로 이어졌기 때문에 메카 순례 행사 중 가장 위험한 의식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003년에 는 이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해 251명이 죽었고, 90년에는 무려 1천426 명이 같은 사고로 숨졌습니다(인터넷).  알라가 유일신임을 밝히는 신앙 증언을 하는 가가 이 메카 순례를 할 수 있는데… 이 무슬림들의 인구가 몇 명입니까? 이슬람 국가는 UN 회원국 191개국 중 57개국이며 인구 60억 중 11억 명에 달합니다(인터넷).   12억의 무슬 림, 세계 인구의 20%가 무슬림, 무슬림 100만 명에 2.7명의 선교사, 매일 4만 명의 무슬림 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나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 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천한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 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1-12절 말씀 중심으 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어떠한 이름인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소망을 주는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2절을 보십시오: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 어떠한 소망을 줍니까?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서 만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후 솔 로몬의 행각에 모인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여 기서 사도들이 선포한 것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이였습니다(유상섭). “예수 안 에서”란 말씀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부활과 승귀로 영화롭게 된 예수님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현재적인 실제가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맡 은 자와 사두개인들이”(4:1) 와서 베드로와 요한 등이 백성을 가르침과 부활의 도전함을 싫 어하여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2-3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회중인 유대인들이였다고 말하면 오늘 본문 4장에 나오는 회중은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 르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유일하게 가진 자들 이였고, “성전 맡은 자”들은 성전의 수 비대장으로서 성전과 성전 주위의 질서와 치안 유지를 총책임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 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눅 20:27). 이 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던 이유는 이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하고 분노를 자극했던 두 가지 사실 때문이였습니다(유상섭): (1) 첫째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칠 권세가 전혀 없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친 것과(vs. “제 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2) 둘째로,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선포하였기 때문입 니다(vs. “사두개인들”). 이렇게 부활의 소망을 부인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박해 가운데서도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 도의 이름”(10절)으로 앉은뱅이 된 자가 건강하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서 ‘살리신’(raised)란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 3장 7절을 뒤돌아보게 합니다: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일으키신) 부 활의 능력을 믿음으로 베드로는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 라” 말한 다음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므로 그가 걷게 되고 뛰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는 이름입니다. 이미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삼일만 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신 그 부활의 능력, 그 능력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치유를 주는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10절을 보십시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여기 본문 10절에서 베드로는 산헤드 린 법정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란 질문을 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뉘 이름”의 질문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고 답한 것입니다. 좀 더 원어에 가까 운 번역은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이것으로 이 사람이 너희 앞에 건강 하게 서 있느니라”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그 들 가운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가져왔음을 산헤드린 법정에서 선언한 것입니다(유상섭).

 

사도행전에는 이 “나사렛 예수”가 20가까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냥 예수가 아닙니 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을 불러 구원받고 사도행 전 2장 38절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병고침 받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치는 사건이 6번 이나 나옵니다. 왜 “나사렛 예수”입니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책을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이름에는 "예수"가 많았습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지도층 유대인들만 해도 5명의 "예수"가 나옵니다. 서기관 예수도 있고 예루살렘 출신의 예수도 있었습니다.  심지 어 대제사장 중에도 "예수"란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도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가 지배하 는 시대에 민족의 구원을 소망하는 유대인들의 열심이 그 자녀들에게 "구원"을 뜻하는 "예 수"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인터넷).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은 어떠한 치유를 주는 이름입니까? 육신의 치유입니다.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 어 걷고 뛰었던 사도행전 3장 역사를 가리킵니다(3:8). 누가복음 9장1-2절을 보면 예수님 께서 12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랬을 때 누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 며 병을 고치더라”(눅9: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병 고 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신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의 긴밀한 연관성입니다.  다시 말하 면,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능력과 권세는 예수님께 서 주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확장하는 복음 선포에 힘을 쓰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처럼 치유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 즉 하나님의 나라 확장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구원을 주는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한 글 개역성경의 이 번역의 의미 전달을 정확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어떤 다른 사람으로도 구원이 있을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반드시 구원이 있을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다른 이름이 하늘 아래 사람들 가 운데 결코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입니다(유상섭).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오직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 말씀의 선포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 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이란 진리를 가리켜 아집과 교만으로 가득찬 독설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유상섭).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던 모하마드를 믿던 석가모니를 믿 던 상관없다고 합니다. 어느 종교를 믿던지 간에 괜찮다고 합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절대 적이고 배타적인 구원의 진리를 상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유상섭 교수님의 말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는 구원 진리의 배타성 을 포기하도록 계속적으로 사회의 모든 방향에서 압력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만 포기하면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고, 이를 굳게 붙잡으면 온갖 비난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 을 얻는다는 복음은 박해 가운데서 더욱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믿는 구원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 전 4장 4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그 도 전함을 싫어하였지만(2절) 결국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남자의 수가 약 오 천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까? 사도 행전 2장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그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의 수가 3천명이라고 하였는데(41절)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에서는 약 5천명이나 예 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복음 전파의 열매는 사도행전 3장과 오늘 본문에 나오 는 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역사로 시작된 것 입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했을 때 나면서 앉은뱅 이 된 자는 육신의 치유만 받아 걷게 된 것뿐만 아니라 영적 치유인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하면 사도행전 3장8절을 보면 그는 뛰서 서서 걷기도 하고 뛰었 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어 떻게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겠습니까? 좀 더 자세한 증거 구절은 사도행전 3장 16절입 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초로 순교한 목사님은 바로 영국사람 토마스 목사님 이였습니 다. 영국 웨일즈의 목사가정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아시아 선교에 불타 24살 때 중국으로 왔고 거기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처음 듣고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전하기를 준비했습니다. 때마침 제너럴 쉐만 호가 한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그 배에 탔습니다. 배가 대동강에 도착하자 그는 그가 가지고 쪽 복음을 뿌리며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예 수, 예수" 한국말을 몰랐던 그는 다만 "예수"이름만 부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불 행히도 이 배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 때문에 한국군인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 주 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배는 불탔고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군인 중에 박춘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백정출신으로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보니 한 외국인이 대동강변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하고 있 었습니다. 토마스 목사였습니다. 그가 뛰어가자 토마스는 그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 다. "예수, 예수"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해 낯선 동방의 나라 무자한 백성에 게 "예수"를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품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쪽복음을 꺼내 이 군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박춘근은 그것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칼을 빼서 힘차게 토마스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토마스의 머리는 대동강변에 뒹굴었고 24살의 젊은 선교사 는 사랑하는 부모가 기다리는 웨일즈를 등진채 낯선 이국땅에서 순교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 다.   그런데 그 뒤에 박춘근에게 이상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 외국 사람이 죽어가면서 " 예수, 예수"하던 소리가 자꾸 귀에 쟁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그 소리가 왔습니다. "예수" 그가 도대체 누구 길래 나를 못살게 하는가? 그때부터 박춘근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60-70년대 한국교회 가장 최초의 집사들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가운데 많 은 목회자가 배출되었습니다(인터넷).

 

 

 

나의 소망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오늘도 살아가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구원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