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3장 17-26절 말씀 묵상]

 

 

성경 역대상 4장 9-10절을 보십시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 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은 그의 책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에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라는 기도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 님이 주시는 복을 우리 삶의 최고 가치로 추구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과 능 력과 목적’이라는 강물 속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던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그밖 의 다른 모든 필요들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에 밀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주위 에서 행하시는 일들 속에 완전히 잠기게 되는 것이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 는 복을 우리의 삶의 최고 가치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과연 정말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모든 필요들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에 밀려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 하고 다른 모든 필요들을 최고의 복으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7-26절 말씀 중심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 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2) 둘째로, 그러 면 이 하나님의 복들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한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째 복은 “죄 사함”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 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 여기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 씀은 “죄 없이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 없이함”란 문구의 “없이함” 은 죄악의 기록을 도말함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blotted out”인데 이 말의 의미는 “의 문” 즉 ‘서류/공문서’(document) 표면에 적혀 있는 잉크(ink)를 완전히 다 지워버리는 것과 같은 용서를 말합니다. 성경 골로새서 2장 1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거스려 대적하는 의 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 게 말하였습니다: “허물의 사람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본문 사도행전 3장 19절의 “죄 없이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죄를 가리워 준다는 것보다 더 강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베드로 자신이 이 진리를 체 험하였으니 그는 일찌기 예수님을 부인한 후 통곡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는 그의 범죄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그는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은 자와 마찬가 지로 되었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은 자와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만일 경찰에서 저와 여러분의 범죄를 다 기록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겁나고 두렵겠습니까? 두려울 뿐만 아니라 그 범죄 기록이 증 거가 되어 벌을 받아야 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의 결과를 맛봐야 합니까? 근데 만 일 경찰청장이 우리의 범죄 기록부를 다 없애라고 명해서 다 없어져서 이젠 아예 죄 없는 사람처럼 대우를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시는 하나 님이십니다. 성경 이사야 43장 25절을 보십시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유쾌하게 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19절을 보십시오: “…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무엇을 가리킵니 까? ‘유쾌하다’라는 단어의 헬라의 번역은 “일·고통·의무 따위의) 일시적 중단[휴지], 소강 상태”를 가리키는 영어 “respite”로 번역이 돼 있습니다(예: 촐 8:15)(Bruce). 그 예로 요 나서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회개치 아니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심판을 들 수 가 있습니다. 그 심판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 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중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사도행전 3장 19절에 나와 있는 이 “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이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중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 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된 영적 구원의 기회들을 가리킵니다(박윤 선). 이 말은 회개하는 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영적 평안을 얻음을 말합니다(박윤선). 죄 에서 해방되어 영적 평안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축복입 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26).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평안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쾌하 게 되는 날”에 대해서 논한다면 저는 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소 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누리게 된 하나님 나라의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 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17절 말씀을 한 예로 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 강과 희락이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인 우 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을 누립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유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두 번째 축복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만유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만유를 회복”하신다 함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만 이루어질 복된 신천 신지의 시대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회복”이란 말은 주님의 재림 때에 만물 이 새롭게 되는 영화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예수님께서 이미 마태복음 19장 28절에서 예 언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 라”(롬8:21).   여기서  “피조물”이란 인간을 제외한 세계의  만물들을 가리킵니다(Hodge). 이 피조물이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쇠하며 부패해졌지만(20절)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인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 피조물 또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회복 때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 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9-10). 이사야 35장 10절을 보 십시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둘째로, 이 하나님의 복들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  이미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선포하였습 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알지 못하고 행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 도행전 3장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 무엇을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고 죄를 행했습니까? 베드로는 그 행한 죄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14-15절). 즉,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고 행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입니다.  베드로는 이 죄를 회개하라고 그의 설교를 듣고 있 는 유대인들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였지만 그가 긍휼을 입은 것은 그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딤전1:13). 그 러나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범하는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십시오: “이 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 다 하시더라 ….”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한 회개에는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라고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26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 선포하였습니다: “…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의 예를 보십시오: “…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 전1:9). 진정한 회개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예배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버 려야 할 우상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하면서 그를 예배하며 섬긴다는 것은 두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첫 번째 복인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순 종으로 받응 해야 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 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분문 사도행전 3장 2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 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일찍이 구약에서 모세가 예언한 바(신18:15)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하나님께서 세우신다고 말씀하였는데 그 선지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2:5)(박윤선). 그 메시아 예수님의 오 심을 예언한 모세는 진정으로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였습니다(신18:22).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그의 예언이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 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모세 선지자의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모세가 예언하여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말씀 또한 믿어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 의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신명기18장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 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 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그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5장 46-47절을 보십시오: “모 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 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 시길 원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은 권면하였습니다. 그는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23 절).

 

  •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재림을 인내함으로 기 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20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들, 죄없이함과 유쾌하게 되는 날과 만유 회복, 이 세 가지 복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 물 론 이미 죄 없이함을 받았지만 결국 예수님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몸, 영적인 몸을 입을 때 에 완전한 죄 없이함을 받을 것입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또한 물론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누리고 있지만 결국 완전한 누림은 주님의 재림 때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특히 만유 회복, 즉 신천 신지의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 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칼빈의 5대강령에서 다섯 번째인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여기에 적용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을 보십시 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2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처음 익은 열매”는 우리가 이미 받은 성령님을 가리킵니 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처음 익은 열매”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받은 생활은, 천국을 완 전히 누리기 전에 벌써 천국의 첫 맛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이렇게 천국의 첫 맛을 보는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 몸의 구속”, 즉,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받을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까지 인내하며 견뎌야 합니다.

 

지난 주 CNN Top News를 보니깐 이스라엘 총리 Sharon의 건강과 West Virginia 탄광에서의 폭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는 이 West Virginia 탄광 폭팔사고에 관 심을 갖고 TV나 CNN 인터넷 뉴스를 보았습니다.  13명 중 12명이 죽고 26살 결혼한 지 얼마 안된 남자는 지금 위급한 상황에 있습니다.   죽은 12명 중 32년 동안 탄광에서 일을 한 51살인 Martin Toler Jr.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쪽지에다가 쓴 짧은 글이 있는데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Tell all I see them on the other side JR. It wasn’t bad. I just went to sleep. I love you.” [모두에게 내가 천국에서 만나자고 얘기해라 JR (싸인 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잠들은 것이다. 사랑한다)]. 이 형제의 조 카인 Randy Toler은 말하기를 자기의 삼촌이 주일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대했던 말씀은 “save your affection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당신의 사랑을 땅에 것이 아닌 위 에 것을 위하여 저장해 놓으라)였다고 합니다.  아마 골로새서 3장2절 말씀 같습니다: “위 에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또 다른 죽은 삼 대째 탄광부였던 Jerry Groves(56)의 brother-in-law Bill Rogers이란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Our only comfort would be that there was no suffering, that they would go to sleep, and there it is”(우리의 오직 위로는 그들이 고통이 없이 다들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