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진정한 복음 전도[날마다 주님 발 앞에 앉아」/ 크리스티그린]란 인터넷 기사를 보면 어느 시대에서나 변함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복음 전도 방식인지를 질문하고 있 습니다.  “개혁 운동인가?  단기 혹은 장기 선교인가?  전도지를 돌리는 것인가?   삶을 통 한 전도인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한 전도인가? 하나님은 물론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사용해 오셨고, 때로는 상당히 극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셨다. 그러 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런 방법들 중 그 어 느 것도 강조하지 않고 있다”(인터넷).  어느 시대에서나 변함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 은 복음 전도 방식은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갈 때만큼 파워퍼(powerful)한 전도 방식이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크리스티그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 연합을 언급하고 있는 전도 훈련 책자와 강의는 별로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참된 교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므로 그런 연합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 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연합한 모임을 경험해 보았는가? 그렇다면 그런 모임이 마치 자석처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 다. 그리고 그 반대도 사실이다. 다투는 교회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성 적인 다툼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다. 성도들의 순수한 연합은 하나님이 복음 전도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도 구다”(인터넷).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2장 42-47절에서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교회(47절)을 묵상했습니다. 그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임을 배웠 습니다(47절). 다시 말한다면 그 초대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매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의 마음을 끌었던 이 초대 교회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도 들이 다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모습 이였습 니다. 최용우씨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고독하고 외롭고 뭔가 뻥 뚫려버린 가슴을 가지고 들판을 방황하는 하이에나와 같은 심령공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쾌락과 물질과 외형적 편리함만을 쫓아 살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은 생명파괴요, 정신병이요, 패역함뿐입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마 음에 진실로 진실로 원하는 것은 '따뜻함'입니다. '정'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사랑'입니 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하고 겸손'하였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다른 말로 하면 따뜻함, 정, 부드러움, 아름다움, 행복, 사랑입니다. 교회가 따뜻하고, 정이 있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런 곳에 저절로 찾아갑니다. 안 가면 미치겠거든요. 그 런데 교회도 자신들의 심령 상태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아 보이니, 현대인들이 교회에 매 력을 느끼겠어요?”(인터넷).

 

우리 교인들은 매력 있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에 힘을 써야 합니 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에 나면서 앉은뱅 이 된 자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하는 사도행전 첫 이적이 나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중심으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란 제목 아 래 내게 있는 것을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내게 있는 것을 주기 위해서는 갈급한 심령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 라보거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갈급한 심령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면서 앉 은뱅이 된 자”(2절)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던 사람 입니다(2절). 그러던 중 하루는 “제 구시 기도 시간”(1절)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 전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하였습니다(3절). 그 때에 베드로 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며 보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하였을 때에(4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는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과연 이 때에 이 앉은뱅이 된 자가 갈급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순간적인 대답은 ‘금이나 은’(돈)일 것입니다. 구 걸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대답이지만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근거는 이 앉은뱅이 된 자가 앉아서 구걸했던 “미문”(2절)(Beautiful)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10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에 이 앉은뱅이 된 자가 앉아서 구걸했던 “미문”(Beautiful)은 그 10개 문중에 “은과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진 열 번째 문으로 흔히 니카노르 문(Nicanor Gate)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유상섭). 지금 앉은뱅이 된 자는 여기서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금과 은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필요했기에 돈을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Win & Charles Arn 박사들이 쓴 책 “The Master’s Plan for Making Disciples”가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흥미로운 도표가 나오는데 그 도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우 리 확대가족(Extended Family) 식구들이 언제 복음에 매우 수용력이 높은가를 알려주는 도 표입니다. 그 도표에 제일 위에 있는 것부터 순서대로 몇 가지 목록을 말하자면 배우자의 죽음, 이혼, 별거, 가까운 가족 식구 멤버의 죽음, 개인 부상이나 병, 직장에서 짤렸을 때, 은퇴 …. 이 두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에게는 “periods of transition”(과도기: a span of time in which a person’s or family’s normal, everyday behavior patterns are disrupted by some event that puts them into an unfamiliar situation) 있는데 그 과도기 를 제공하는 사건이 우리 삶 속에서 최근이면 최근일수록 그리스도나 교회와 같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가가서 전도해야할 우리 확 대가족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에 있어서 별 문제도 없고 이례적인 방해가 없다 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나 교회가 같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적다는 논 리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중보기도’와 ‘과도기’와의 관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그러니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된 것처럼 우리가 중보기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특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 도 있겠지만 또한 앉은뱅이 된 자처럼 매 주일 마다 교회에 그냥 갈급하여 (무엇인가 필요 하여)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지 않 고 있는 중보기도 대상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중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에 갈 급한 심령을 파악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 니까?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이것은 “집중적인 주시에 의한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가리킵니다. 인격과 인격의 참된 접 촉은 서로의 시선을 맞추어 직시하는 장면에서 이루어집니다(박윤선).

 

우리는 갈급한 심령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인생의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을 관 심 있게 봐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집중적인 주시에 의한 인격과 인격의 접촉이 있어야 합 니다.

 

둘째로, 내게 있는 것을 주기 위해서는 내게 없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에게 없는 것을 앉은뱅이 된 자에게 분명하게 말하였 습니다. 이 얼마나 구걸하던 앉은뱅이 된 자에게 실망되는 말입니까? 은과 금으로 장식되 어 있었다는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서 날마다 구걸하고 있었던 앉은뱅이 된 자에게 베 드로의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은 충분히 낙심시킬 수 있는 말 이였습니다. 우리 생각엔 ‘어 떻게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왜 그는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앉은뱅 이 된 자가 요구하는 은과 금을 주지 않고 없다고 어떻게 저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있는 척 한다면 그것은 더 상 대방을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요구에 없는 것은 없다고 명백하게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com 시사 디지털 스토리 인터넷 기사 “이것만은 버리고 가자…/뿌리 깊은 허 세病’(이환경 방송작가)를 보니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다른 장점에 의해 감춰지고 보완되는 것일 뿐 조금씩 그 분수를 벗어나는 결함을 지닌 채 이 세상을 살 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분수에 어긋남 중에 무엇으로도 결코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른바 ‘척’이 그것이다. ‘척’은 ‘체’라고도 한다. 모르면서 아는 척, 못난 것이 잘난 척, 없으면서 있는 척….” “이 ‘척’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과시욕을 그 근거로 한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인 병에 속한다. 왜냐하면 억지로 자신을 포장하여 내세우고 거짓으 로 진실을 위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척’이란 것은 그 실체를 파헤쳐보면 허세 허식 허 영과 다름없으며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과장 사치 낭비 거짓 탐욕까지도 이 ‘척’에 속한다. 이 병의 원인은 그만큼 자신의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데 있다”(인터넷).  우리 없는 것을 있는 척 하지 마십시다.   우리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십시다.   우리 돈 이 없으면 없다고 하십시다. 우리 있는 척 하지 마십시다.

 

마지막 셋째로, 내게 있는 것을 주기 위해서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3장 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 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은 과 금을 요구하면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 된 자에게 우리는 무엇을 줘야 하는 것입니 까?   한국 총신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한 강도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 가지 들은 이야기는 총신 신학교 한 교수님의 쉬운 것 같으면서도 핵심 진리를 가르쳐 주는 시험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시험 질문은 ‘성도님들이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님들 개개인 마다 제일 필요하다 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다 다들 수 있겠지만 영적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 모두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앉은뱅이 된 자의 입장에서는 금 과 은이 제일 필요로 하여 그것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도 베드로와 요한 입장에서 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에 앉은뱅이 된 자가 제일 필요한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 앉은뱅이 된 자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 다. 그것은 바로 걷는 것이었습니다. 맞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 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 했습니다(6절).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내게 있는 것”이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걷는 것”이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어떠한 마술 공식이 아닙니다. 마치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권위와 영향력을 대 표하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라 는 이름의 권능은 성령님께서 그 이름 때문에 행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의 이름이 가진 놀라운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걷게 하는 기적을 행하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그 믿는 수가 날로 더하여졌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잡혀 와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 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본문 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 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 십니다.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며 우리의 참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생명을 얻고 충만한 삶을 살 수 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이름입니다.  히브리서 2장 7절 에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과 존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해야 합니 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고, 하 나님의 영광과 존귀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려고 하는데 왜 나에 게 이러한 고난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 역시 영원이라는 시점에서 볼 때에는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 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순 간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은 능 력을 행하시는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여러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구할 수 있는 능력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 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들은 이 놀라운 이름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무기력하고 소망 없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인터넷).

 

송정미 사모님의 “예수”라는 복음성가 1절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높고 높은 보 좌를 떠나 하늘 영광 버리고/ 낮고 낮은 우리를 찾아 내려오신 하나님 절망 속에 헤매는 인 간, 한 사람 또 한 사람/ 만나 주시기 위해 내려오신 주님 그 분은 예수 아름다운 그 이름 예수/ 병든 자 고치며 눈 먼자 뜨게 한 능력의 이름 예수 오~, 예수 그의 이름 영원하여라/ 죽은자 살리며 모든 눈물 닦아준 하나님 아들 예”(인터넷).   우리는 아름답고 영원한 “예 수” 그 이름을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재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서 “예수”라는 이름의 권능을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 도할 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영적으로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또한 주님으로 영접하여 새 생명을 얻는 역사를 우리는 보고 듣 는 것입니다.

 

 

 

갈급한 심령을 주목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새 생명을 얻는 역사를 더욱더 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