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더하시는 교회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 묵상]

 

 

릭 워렌 목사님(새들백교회 담임)은 이러한 주장을 하셨습니다: “21세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이다.   교인 숫자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다.” “교회 성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1) 교회는 친교를 통해 더욱 따스하게 성장할 필요가 있고, (2) 제자직을 통해 더욱 깊어지 며, (3) 예배를 통해 더욱 강건해지며, (4) 사역을 통해 더욱 넓어지며, 그리고 (5) 전도를 통해 더욱 크게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숫자보다는, 사역과 선교를 위해 동원되는 교인들의 퍼센티지가 그 교회의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보다 정확한 척 도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건강한 것입니까?   예배를 통해 더욱 강건해지며, 교육을 통 해 더욱 깊어지고, 사역을 통해 더욱 넓어지며, 교제를 통해 더욱 따스하게 성장하며, 전도 를 통해 더욱 크게 성장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도 좋지만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할 때 “주님이 더하시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 과연 주님이 더하시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더하시는 교회는 첫째로 4가지 일에 전혀 힘씁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 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 을 선포한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3000명이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 이들이 예수님의 자기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세례를 받은 후 한 4가지 일 에 전혀(지속적으로) 힘을 쓴 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에 전혀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 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안 된 성도들이였기에 믿음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가르 침을 받기에 전혀 힘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 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예수님의 발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참 제자 의 모습으로 그린바 있습니다(2:46; 8:35; 10:39)(유상섭). 예수님과 우리와의 이상적인 관 계를 추구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총신 신학교 한 교수님의 시험 질문이 이거였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이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답: 하나님의 말씀.   성도님들 개개인 마다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영적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 모두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 다.

 

  • 서로 교제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 서로 교제하며….” 저는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인 “교제”(fellowship)는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제인지 의문이 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제”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코이 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단어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고(공유) 둘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의미가 있 습니다(분유).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도간의 교제는 단순히 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며 재미있 는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단지 지난주 에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런 것은 거듭나기 이전에도 해왔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나눔 들이 있었습니다.  바 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배운 것을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 “다른 성도의 어려움을 중보기도 하는 것” “자신의 소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그러므로 단순한 사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재미있는 대화나 나눔과는 다른 근본적인 것 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교제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에는 정관사가 붙 어 있어 “그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성령의 교제” 를 가리킵니다(유상섭).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 가운데 약 3000명 새로운 성도들이 함께 공유했던 것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 는 성령의 교제에 헌신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교 제는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서 일치와 단결을 이룬 인본주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이 중심과 핵심이 되는 성령의 교제 공동체였습니다(유상섭).

 

  • 성찬에 전혀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   떡을 떼며   ….”   학자들은 주로 이 말씀은 “성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그들은 성찬에 전혀 힘썼다는 말씀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내년에는 성찬을 4번에서 6번으로 늘여서 두 달엔 한번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 서 “기도”라는 단어는 복수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각종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했음 을 가리킵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기도”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라고 저자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120문도의 기도 (1:14)를 본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교회가 3천 명으로 확장되었을 때 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게 교인들의 수적인 성장은 곧 기도하는 사람들의 증가를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 루살렘 교회에게 기도는 교회 성장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교회가 계속해서 가져야 하는 본 질적인 모습임을 확인시켜줍니다(유상섭).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말씀과 교제와 성찬과 기도에 전심으로 헌신했었을 때 어떠 한 결과가. 었습니까?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3절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한 마디로 결과를 말한다면 교회가 불신 자들 사회에서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박윤선). 요즘 교회의 영적 권위가 우리가 살아가 고 있는 불신자들 사회에서 얼마나 추락되어 있습니까? 교회란 공동체가 전심으로 노력해 야 할 것에 헌신하고 있지 않고 다른 것에 헌신하고 있으므로 서로 싸우고 다투고 분쟁과 분열로 말미암아 불신자들 가운데서 교회는 영적 권위를 너무나 많이 잃은 것은 우리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불신자들조차도 교회를 향한 두려움, 경외심이 없는 듯 해 보입니다. 더 이상 교회에서 초대 교회 “기사와 표적”과 같은 하나님의 특수한 역사가 교회에 없기에 교회가 우습게 여김을 받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힘써야 할 것에 힘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참된 교제와 성찬과 기도에 우리는 전혀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불신자들 앞에서 교회로서 영적 권 위가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주님께서 더하시는 교회는 성도의 교통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 시간에 신앙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면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매 주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서 우리가 매 주일 고백하고 있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는 어떠한 교인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 44-47절에 근거하여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나누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4-45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 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재물 공유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교인들이 모두 각자의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납한 후에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공동 분배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재산 공유가 각 성도들의 사유 재산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내의 성 도들 가운데 궁핍한 문제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부동산(재산)이나 동산(소유)을 팔아 처분하여 이러한 필요를 해결했음을 보여줍니 다(유상섭). 예루살렘 교회 내에 모든 사람이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는 자들 중에 서 모두가 다 기증한 것도 아닙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기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의 궁핍의 문제를 다른 성도들이 감당했습니다.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는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6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지금 말로 한다면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교회에서나 집에서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진정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회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성도 들은 성전에나 집에서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무엇을 했습니까?

 

  • 그들은 집 집 돌아가면서 모여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식탁 교제를 하였습 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6절을 보십시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 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성찬과 더불어 교인들 끼리 음식을 나누는 식탁 교제를 하였습니다(유상섭). 그리고 이 식탁 교제를 기쁨과 순전 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구역 모임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이기를 힘쓰 는 가운데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 중심된 식탁 교제를 나누므로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달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공 동체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며 …”.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 중심된 식탁 교제를 나눈 후 하나 님께 함께 찬양을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그룹 모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4가지 일에 전혀 힘쓰며 성도의 교통이 있었을 때 “온 백성 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47절). 36절에서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 에 못 박은 이 예수를…”라고 베드로는 설교를 하였는데 말씀에 반응하여 회개하며 세례를 받은 3000명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와 성찬과 기도에 전혀 힘쓰며 또한 성도의 교통이 그들 가운데 있었을 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온 집”이 이젠 예수님의 믿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호감을 갖 고 보면서 칭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47절). 주님의 몸 된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말씀과 교제와 성찬 과 기도에 전혀 힘쓰며 성도의 교통을 추구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승리장로교회를 섬기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더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