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사도행전 2장 1-13절 말씀 묵상]

 

 

과연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놀라고 있습니까?   만일 놀라고 있 다면 왜 놀라는 것입니까? 일반 어느 날 일본 과학자들이 땅속으로 50m를 파고들어가 작 은 구리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이 구리조각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일본은 고대 일본인들 이 이미 2,500년 전에 전국적인 전화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중국정부 가 발끈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는 과학자들에게 그보다 더 깊이 파볼 것을 종용했습니다. 100m 깊이에서 중국 과학자들은 조그만 유리조각을 발견했고, 곧 고대 중국인들은 3,500 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광통신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보도에 한국 과학자 들은 격노했습니다. 한국 과학자들은 200m 깊이까지 땅을 파고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발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한국 과학자들은 고대 한국인들이 5,500년 전에 휴대전화를 가지 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인터넷).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래는 이 유는 마치 이 예화처럼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마치 한국 과학자들이 5,500년 전에 한국에선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는 ‘작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 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으므로 말미암 아 세상을 경악시키는 시대도 이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젠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악행 을 통해서 놀라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떠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놀램이 아닌 긍정적인 놀램을 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2절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어찐 일이냐”란 말은 New Korean Standard Version에는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오늘 본문에서 약 120문도에게 일어난 놀랄 만한 일이 무 엇이기에 주위에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5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라고 서로 말했는지 생각해 보면서 세상 사람들을 놀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을 놀래게 하기 위해선 한 곳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 이 한 곳에 모였더니”. 왜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모이기가 점점 힘들어 진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몇 가지 생각나는 이유를 적어 봅니다:

 

  • 바쁨(분주함)입니다. 가정을 보아도 식구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기가 힘 들다고들 합니다.    자녀들이 각자 일에 바쁘다 보니 부모님의 입장에선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하십니다. 교회도 비슷합니다. 다들 각자 일에 바쁘다 보니 다 한 곳에 모이기가 힘든 것입니다.

 

  • 바쁘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이러 저리 좇 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러 저리 좇기다 보니 우선순위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 속도가 빨라지는 세 상에 살면서 삶 터전에서의 일에 시달리다보니 분주함 속에서 이러 저리 쫓겨 다니다가 결 국은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우선순위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결국, 교회 중심 생활하기가 점점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히브리서 10장25절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 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 이 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은 더욱더 심해질 것인데 우리는 교회에서든 가정에서 든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더욱더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절을 보면 오순절 날 약 120문도가 다 한 곳에 모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묵상한바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120문도가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여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1:14). 이 “기도”는 사도행전에 주요 주제중 하 나입니다. 기도에 대한 언급은 1장 14절에 처음 등장하여 28장 8절까지 무려 32회나 등장 합니다(유상섭).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1세기 시대 때 사도들과 초 대교회의 기도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 교훈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 니다(유상섭). 이 120문도가 모여서 함께 기도한 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 는 가운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 우리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해야 합니다(1:14). 하나님의 은혜는 합심한 곳에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어서 서로 다투는 곳에서는 진정한 기도의 분위 기를 이루지 못합니다(박윤선). 야고보서 4장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다투고 싸우 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니라.. 우리는 합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합심 기도를 드리데 마태복음18장19 절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 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최고의 동역 입니다.

 

  • 우리는 “전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행1:14). 이것은 끝까지 참으며 힘씀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기도에 헌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분주함입니다(나우웬). 그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기도의 우선순위가 생활화 되지 못할 위험이 많습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합심하여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합니다. 나 자신의 부흥과 가정의 부흥과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놀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이 우리의 합심 기도의 능력과 결과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을 놀래게 하기 위해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다락 (1:13)에서 약 120문도가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던 것처럼 구약 3대 축제 중 하나인 오순절에 이 120문도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2:1)(유상섭). 그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120문도들 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2:2).   여기서 하늘로부터 홀연히 급하게 분 “강한 바람” 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루아흐”란 단어가 “바람”이란 말인데 이 바람은 “하나 님께서 성령으로 임재 함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삼상22:16; 욥37:10; 겔13:13)(유상섭). 이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을 저자 누가는 120문도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이 문구는 오늘 본문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는 문구가 비교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저자 누가는 120문도가 성 령 충만함을 받은 사실(4절)을 2절에서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까? 구 약에서는 성막과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인 성령으로 가득 찼었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 는 “생명의 새 바람 성령이 120명을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으로 세우”심으로 이 새 언약 백성이 바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유상섭). 성막이나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결국 이 120문 도들은 사도행전 1장4절과 8절의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다리므로 약속의 성취 인 성령으로 세례를 경험하면서 더불어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도 제목 중에 성령 충만함을 구하는 기도 제목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성령 충만함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로 충만해짐을 말합 니다. 생수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요 7:37-39).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인 터넷). 그러면 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방법은 기 도하는 것입니다(2:4; 4:31; 6:3, 5; 9:17).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 일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기도하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 사도행전의 역사들을 보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서 합심으로 성령 충만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시1:2). 성령 충만함이란 말씀 충만입니 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우리 전인격이 그 말씀에 지 배를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지배를 받고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방해하는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인터넷):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 성령 충만은 방해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소홀히 하고 그로부터 공급받는 능력을 약화시켰습니 다.

 

  • 리는 교만과 거만한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 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교만은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십니다. 교만은 사단의 죄입니다(사 14:12-1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 5:5).

 

  •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해하여 두려움을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이 다른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기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비기독교인 사회의 행위와 표준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 로서(벧전 2:9) 복음을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고백하지 않는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능력의 생명선을 끊어버립니다(시 66:18). 그리스도인의 심중에 아직도 곱개하지 않은 육체적, 인격적, 정신 적, 영적인 죄악이 한 가지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결코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세속적 쾌락에 물든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을 사랑하고 세속사 회의 풍습에 젖어서 살려는 욕망 때문에 방해 받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 비 결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마 6:24-33).

 

찰스 피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 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빛을 소유 했으므로 죄인이 회개 안하는 죄보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죄가 더욱 크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죄가 큼을 알아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에베소서 5장18절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 러분이 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보므로 놀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세상 사람들을 놀래케 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큰 일”을 말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1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 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오순절 날 120문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 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3절). 이것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이 120문도들은 방언들을 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방언들은 “그 때에”(5절) 모인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의 언어로 방언을 하였습니다(6, 8절). 여기서 “천하 각국”이란 말은 15개국 혹은 15지방들을 가리키는데 그 때까지 알려진 세 대륙인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지방들이였습 니다(박윤선).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과 연관시켜서 볼 때에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5절에 예루살렘, 9절에는 유대 그리고 10절에 가서는 로마가 각각 소개되고 있 는 것을 보면 120문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말한 방언들은 그 당시에 천하만국을 대표하는 15개 지방(지역)들로서(유상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바울의 관점에서는 “로마”) 이르러 성령 충만한 예수님의 증인들의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선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성령 충만 하여 말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구약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상 기 시킵니다. 인간의 교만한 죄로 말미암아 바벨탑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흩으시고자 언어를 다양하게 하셨는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13절에서는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하였 을 때 각각 제자들이 천하만국을 대표하는 지역 사람들의 언어로 방언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하셨습니다(11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일”(the mighty deeds of God)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여러 주석들이 이 문구에 대해서 잠잠한 편인데 몇 몇 주석들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praising God)이라고 맗 고 있습니다(박윤선, The Bible Exposition, The Bible Knowledge). 바빙(H. Bavinck)에 의 하면, 천지 창조의 때에 천사들이 찬송하였고(욥38:7),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천군 천사들이 찬송했고(눅2:13-14), 오순절 성령 강림이 큰일인 고로(2:11) 역시 찬송의 목적으로 기적적 인 방언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박윤선). 결국 오순절의 사건은 바벨 사건의 반전 (reversal)인 것입니다.   바벨탑에서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자기 자신들을 찬양한 사건이 라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120문도들로 하여금 천하만국을 대표하는 방언들로 하나님을 찬양 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방언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다닐 때 배운 바로는 사도 시대 때 방언은 단절(cessation)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방언은 없다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보면서 좀 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도 시대 때의 방언은 단절되었지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의 은사까지 단절되었 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방언이 우리 시대에 남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된 방언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는가 하면 또한 방언의 은사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처럼 자랑삼아 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방언을 해야 한다는 말이 성경에는 없건만 방언을 하면 왠지 다른 교인들보다 내가 더 성숙함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절과 11절에서 우리는 사도 시대 때의 방언에 대하여 한두 가지 원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째 원리는, 방언이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 늘 본문 사도행전 2장 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 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 언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언한다는 말씀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과 말씀을 우리는 뛰어 놓고 따로 생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둘째 원리는, 방언이란 “하나님의 큰 일”,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목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2절을 보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 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 하나님께 하는 방언은 교회에 덕이 돼야 하며(26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28절)해야 합니다. 한 2주전에 나눈 말씀 중에 이사야 43장 21절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 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기 위하여 하나님께 서 새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한국어로 찬양하던 영어로 하던, Espanol로 하던, 각 나라와 족속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 하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므 로 세상 사람들을 놀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놀래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 운데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므로 우리는 세상을 놀라게 하십시다!

 

 

 

세상 사람들을 놀래게 하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