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행전 1장 1-5절 말씀 묵상]

 

 

어린이 동요의 한 구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꼭꼭 약속 해.” 어린아이들이 약속을 할 때 즐겨 부르는 동요의 한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약속 이라는 게 깨지기 쉽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계속 약속을 다짐하는 방법과 절차가 진화합 니다. 처음에는 단지 새끼손가락을 걸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새끼손가락을 건 뒤 엄지손 가락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이제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은 뒤 서로 손바닥을 맞대면서 ‘복사’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약속을 복사까지 해놓았으니 반드시 지키라는 얘기 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 복사를 한 뒤 손바닥에 사인하는 절차를 추가한 아이들도 있습니 다. 약속에 대한 그들 나름의 삼중, 사중 잠금 창치입니다(인터넷).

 

우리는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전 서울 이 시장은 “많은 정치인들이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를 (공약으로) 내걸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 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선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칭했습니다. 그의 이 약속에 이러한 리플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속을 하고 또 그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이 시 대 최고의 정치인 이십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 존경합니다.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 니라 진정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분이기에 그래서 찬사를 보내고 좋아하는 거지요. 이 모 시장 파이팅!’(인터넷).    니체는 약속에 대해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 만한 좋은 기억을 가져야 한다.” 또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그 약속이 성취 되기까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한 3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는,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다른 초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그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행적이기 때문입니다(유상섭). 초대교회 때문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가 천상통치를 하시는 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 여 이 땅에 우리 교회 안에서 또한 교회를 통하여 사역하고 계심을 믿기에 사도행전을 묵상 하면서 우리 교회가 그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길 원합니다.

 

  • 둘째는, 사도행전의 주제들인 기도, 성령, 교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말씀 의 확장 등등이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배워야 할 귀한 주제들이라 믿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묵 상하고자 합니다.

 

  • 마지막 셋째로, 이번 새 생명 축제를 준비하면서 내년 ‘전도와 선교/봉사’에 사 도행전 책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사도행전 서문인 본문 말씀 사도행전 1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한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약속을 주시는 자는 누군 이신가?, (2) 약속을 받는 사람 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3) 약속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약속을 주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4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누가 복음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개종한 이방인 초신 자였던 데오빌로(이름 뜻: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라는 “각하”(눅1:3)(로마 식민지에 파송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로마인으로 추 정)에게 누가복음 외에 사도행전도 써서 보내면서 이 사도행전 서문(1:1-5)에 자기가 “먼저 쓴 글”에 대해서 잠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누가복음 핵심 요약은 바로 1절 하반절과 2 절에 이렇게 적혀습니다: “…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 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즉, 누가의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의 핵심 요약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 시작한 것 전부에 관한 것입 니다(유상섭).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시작하심부터”, 즉 ‘시작하다’라는 단어 입니다.   그 이유는 저자 누가는 이 단어를 통하여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이 완전히 다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관한 기록의 “시작”에 불과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계 속하실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혹은 교회를 통하여 그의 사역과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시기 전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4절에서는 그의 부활하신 후에 이야기를 누가는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 일동안”(3절)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는데(3 절) 그 중에 하나가 사도와 같이 모이사(4절)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의 제자들 앞에서 잡 수시면서(눅24:42-43) 자신의 약속한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을 누 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을 동사로만 표현한다면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4절).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박윤선):

 

  • 째로, 예루살렘이 역시 신약 운동 출발의 장소로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야 2장 3절 보십시오: “…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 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 둘째로, “신약 운동과 예루살렘과의 관련성은, 일반 역사의 원리로도 당연한 것 으로 생각됩니다. 중심 지대는 대중이 움직이는 곳이니, 진리를 전파하는 일이 그런 곳에 서 시작될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인 진리가 전파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또한 명하시고 계십니다. 부활의 약속을 하신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신 후 제자들에게 증거해 보이 시면서 또 다른 약속인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고 명하신 것은 그 약속의

 

성취가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하나님 의 아버지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뤄질 것을 확실시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약속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약속의 주시는 자(The Giver of the Promise)이시자 또한 약속으로 주어진 자(The Promise Giver became the Given One) 이십니다. 그는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신 주님이 시기에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민23:19) 이사야 55장 11절을 보십시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 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둘째로, 약속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들” 혹은 ‘제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2절과 4절을 보십시오: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 로 명하시고 …”(2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4절). 약속을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부활부터 승천까지의 40일이란 기간 동안 제자들을 성령으로 가르치 시고 명하셨습니다(2절).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승귀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역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그러면 부활과 승천사이의 40일 기간 동안 예수님의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 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르치고 명하신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유상섭): 첫째로, 예수님 께서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나타내신 사건과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한 것. 결국 예수님께서 40일간의 나타나심과 가르치신 목적은 그의 부활 증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조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메시지 선포 속에서 계속 강조되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절 대적 중요성을 예고합니다(유상섭).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3절은 예수님의 고난(“해 받으신 후”)과 부활하심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까지 40일 동안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확실한 많은 증거로 부활하심을 나타내신 예 수님은 복음의 핵심으로서 약속을 받은 제자들의 책임은 그 복음을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나 라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복음의 선포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는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복음의 내용은 역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유상섭).

 

여기서 몇 가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6장18절을 우 리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로서 (1) 첫째로, 주님께서 성령님으 로 명하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2절).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하시는 성령님 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2) 둘째로,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 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고 계시는 확실한 증거가 많아야 합니다(3절).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3)마지막 셋째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주님의 도구 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고 있습니 까?

 

마지막 셋째로, 약속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5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 세례란 무엇입니까?  다양 한 견해가 있습니다. 가핀(Gaffin) 교수님은 성령세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 선물 등으로 불려지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 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안영복 교수님은 오순절 날에 각 사람위에 '성 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님은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습니다. 또한 우희영 목사님은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 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로 이드 죤스 목사님은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 (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 을 수 없다고 했는데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 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습니다. 칼빈 또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습니다. 이러 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습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레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 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 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 령세례를 말합니다.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 오늘 본문 사도행전 1장 5절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 에 의해 약속된() 성령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 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 가 되신 그 신비 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 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 며 단 회적 사건으로 성령 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야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습니다(인터넷).

 

우리는 여기서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함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혼동을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견해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견해는 성령 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여 오순절 때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체험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체험을 성령 충만으로 보는 견해이고 성령 충만을 성 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학자 중에는 토레이(R.A. Torrey)와 디기(D. Gee) 그리고 윌리암스 (E.S. Williams)등의 오순절 계통학자와 브루스(F.F. Bruce)와 옥켄가(H.Ockenga)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동일한 사역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 의 경우와 같이 불같은 세례를 부으면서 충만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엡 5:8)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즉 처음으 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을 성령의 세례로 보았기에(행 1:4-5, 2:1-4) 성령 충만을 받으라 는 말씀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시하였습니다. 따라서 브루스는 ‘성령세례 의 결과가 성령 충만이며, 성령 충만은 그 후 여러 번 계속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 나의 견해는 성령세례를 성령 충만과 구별하면서 성령세례는 단 회적 작용이지만 성령 충만 을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표현은 성령이 믿는 자 의 마음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성령이 아닌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실례가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문귀에 나타 나 있습니다. 데어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여기에 사용된 동사를 ‘전체 마음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점유는 그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 동사도 조격을 받고 있는데, 그 조격은 그 수단에 의해서 동사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동사의 행동은 신자에게 미치는 어떤 지 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말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으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 서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와 구분되어 지는 성령의 인격적 지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와같은 견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임한 것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와 다르다" 고 하였습니다. 스토트(J.S. Stott)는 말하기를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세례의 결과이며, 세례는 독특하게 처음으로 얻는 경험이고 충만함은 영적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은 성 령의 비상한 은혜’라고 하였습다. 로이드 죤스도 성령의 영향아래 있는 것, 성령께서 우리 를 통제하는 것을 성령 충만으로 보았습니다. 빌 브라이트도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외에 R.펙손, J.월 부어트, A.머레이 등이 성령의 충만을 인격적인 성령의 지배로 보고 있습니다(인터넷). “성 령 세례와 성령 충만” 교리 요약입니다(인터넷):

 

  • 성경세례:
    • 성령세례는 예수 믿는 자에게 즉시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 성령세례는 물세례로 인표를 합니다,
    • 성령세례는 체험을 수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 성령세례는 한 번으로 끝나며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 성령 충만:
    •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에게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상태입니다,
    • 성령 충만은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성령 충만은 게으름이나 죄로 인해 상실할 수 있습니다,
    • 성령 충만은 회개하고 기도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 성령 충만은 비상시기에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특별히 무장시키는 수단 일 때가 있습니다,
  • 성령 충만은 체험을 수반할 수 있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요건은 아닙니다,
  • 성령 충만의 증거를 항상 체험에서 찾는 것은 바르지 못하며 그것보다 오히려 생활에서 나타나는 거룩과 순종에서 찾아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약속으로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약속의 성 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13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 니”. 우리는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 로 영접했을 때에 성령 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젠 약속으로 성령 세례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말씀 충만, 믿음 충만하여 주님 다시 오시 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날까지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약속 중 하나는 그의 다시 오심입니다(재림). 그러나 베드로후서 3장4절 을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 말하기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있느뇨.” 이러 한 때에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특히 영생에 관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교회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I will build my church)(마 16:18).  우리 모두 이 약속의 말씀 꼭 붙 잡고 그 약속을 주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성령 충만하여 신실하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힘을 쏟으십시다.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