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시편 146]

 

 

여러분은 배반당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렇게도 믿었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껴 보신 적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어제 새벽기도회 때 예레미야 11장 15절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많이 행음하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 많은 우상들을 숭배하며 섬겼던 유다 백성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무마하려고 했던 것인지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는 제사에 필요한 고기들을 받쳤던 유다 백성들, 이렇게 악을 행하며 기뻐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는, 또한 과연 나의 가정은, 그리고 과연 영적인 가정인 승리장로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혹시 나는 유다 백성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마음은 멀리 있어서 영적 간음죄인 우상을 섬기면서 예배에 필요한 헌금을 가지고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아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지 …? 하나님의 음성은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 예레미야 11장9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우상숭배의 죄를 가리켜 “반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유다 백성들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으셨을 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지 않고 등을 돌리면서 우상들을 좇아 영적 간음죄를 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 중에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 인간들을 믿을만한가? 과연 우리 사람들은 의지할 만한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과연 나는 (상대방에게) 믿을 만 한 사람인가?’’ 저는 제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 시편 146편은 “할렐루야 시편들” 다섯 중에 제일 첫째입니다(146, 147, 148, 149, 150편)(박윤선).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 시편146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1-2절).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할렐루야” 즉 “너희는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되 그는 우리가 다 함께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다 함께 평생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은 믿을바 되지 못하여도 하나님만은 영원히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한 마디로, 그는 우리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방백들”, 즉 “사람들이 보기에 유력한 자들”(박윤선)이나 “인생”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면 안 됩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은 도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3절). 그래서 시편 기자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4절).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 인간들, 죽으면서 우리 사람들의 계획들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어떻게 우리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사람을 의뢰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 신뢰는, 하나님 신뢰의 길을 차단시키는 악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남들로 하여금 하나님 신뢰의 행위에 나아가게 하려고, 먼저 인간 신뢰의 죄악을 금지시킨다.” 도울 힘이 없는 사람들을 신뢰하는 행위는 진정한 우리의 도울 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의 권면처럼 먼저 도울 힘이 없는 인간을 신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의뢰하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도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우리의 도움을 삼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이유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참되신 전능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46편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 사람이 또 다른 피조물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과 조물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누구를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물론 피조물보다 당연히 조물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종종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인지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조물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참되신 전능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자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을 환난 날에 도우실 수 있습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들은 저와 여러분을 도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하나님이시요 전능자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우리의 도움을 삼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46편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우리가 종종 의지하는 사람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참 간사합니다. 우리는 거짓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실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실행하심에 있어서 영원히 진실하십니다(박윤선). 비록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에서 책임에 불성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미쁘시사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기에 그는 영원힌 진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우리의 도움을 삼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46편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나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공의를 베풀어 주십니다(7절).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압박을 당할 때에 공의로 판단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9절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7절).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7절).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붙드십니다(7, 9절). 즉, 우리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지지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지지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8절). “소경”이란 육신적으로 소경도 있지만 또한 영적으로도 소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소경의 눈을 여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육신의 보이지 않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보이지 않음도 치유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8절). 여기서 “비굴한 자”들이란 비천해진 자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즉, 우리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천해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비천해질 때에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객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9절). 우리가 이 나그네 된 세상에서 객처럼 살아갈 때에도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호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울 힘이 없는 사람들을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사람들을 자꾸만 의지하려고 한다면 어느 면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참되신 전능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으로 우리의 도움을 삼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자하시기에 우리는 우리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아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찬송가 349장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