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참담한 마음

 

 

[시편 143]

 

 

제 사촌 동생 중에 어릴 때 어둡고 캄캄한 방을 참 무서워했던 형제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그 형제가 그렇게 어둡고 캄캄한 방을 무서워했던 이유는 자라나면서 자기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부모님의 징계로 아마 아버지인가 자기를 어두운 방에다 집어넣고 그런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 형제가 중학생 때에 저희 교회 수련회 때 어느 기도원 쪽으로 간 것으로 기억나는데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그 때 저희 교회 전도사님이 기도원 산에서 그 형제를 어두운 곳에 홀로 뒀었나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이 형제가 말을 안 들으니까 아마 징계로 그렇게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그렇게 어둡고 캄캄한 방이나 장소를 무서워했던 이 사촌 동생이 저는 오늘 성경 시편143편을 묵상하면서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시편 143편 4절에서 시편 기자 다윗이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담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야후 인터넷 사전을 보니까 “국어사전”에 (a) 몹시 암담하다, (b) 참혹하다”라고 적혀 있고 “한자사전”에는 “(a) 어둠침침하고 쓸쓸함”, “(b) 참혹하고 암담함” 또는 “(c) (일이나 상태가) 비참하고 막막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자기의 마음이 “참담하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 히브리어 원어 의미는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인 큰 재앙(재난)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소름끼칠 정도로 마음이 두려워하였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기의 범죄로 인하여 큰 재난을 만나 그의 인생에 참으로 어둡고 캄캄한 가운데서 그의 심령이 속에서 상하였고 마음이 참담하였을 때 오늘 본문 시편 143편을 쓴 것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143편 4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다윗의 상태는 한 마디로 ‘상한 심령’ 또는 ‘참담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 묵상 한 시편 142편 3절에서도 다윗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시편 143편 4절에서도 다윗은 그의 심령이 속에서 상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마음이 참담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그는 심령이 속에서 상해있었습니까? 왜 그의 마음이 참담해있었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다윗의 심령이 상하고 마음이 참담하였던 이유는 그의 원수가 그를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원수는 아마도 다윗의 아들 압살롬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는가 하면 70인경의 어떤 사본들에는, 이 시편 표제에 “그 아들 압살롬이 그를 잡으려고 따라올 때”란 문구가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지난 주 수요일 묵상한 시편 142편에서 다윗을 핍박하였던 사람이 사울 왕이였던 반면에 오늘 본문 시편143편 에서 다윗을 핍박하며 그의 생명을 노렸던 사람은 그의 아들 압살롬 이였다고 생각해 볼 때 참으로 다윗의 인생은 왕이 되기 전이나 이렇게 왕이 되고나서도 자기의 심령을 상하게 하며 마음을 참담케하는 고난과 핍박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은 사울 왕에게 핍박을 당할 때에는 다윗이 어떠한 죄를 하나님께 범해서 하나님의 징계로서 사울 왕에게 핍박을 당한 것이 아닌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에게 받았던 핍박은 다윗의 범죄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시편143편이 일곱 회개 시편들(6, 32, 38, 51, 102, 130, 143) 중 최종편입니다(박윤선). 다윗은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핍박이, 그러므로 자기의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마음이 참담한 원인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절망적 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의 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의 아들인 압살롬이라고 생각할 때 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입니까? 자기의 생명을 헤하려고 핍박하는 원수가 자기의 핏줄이라니, 상상이 되십니까? 한번 우리 자신을 다윗의 입장에 서보려고 상상해 볼 때 저는 자식에게 쫓겨 도망가는 아버지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는 이미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고 있었습니다(3절).

 

이러한 절망적이고 괴로운 참으로 참담한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한 2가지로 오늘 본문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과거에 주님께서 행하신 행사를 기억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43편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우리가 시편을 매주 수요일마다 계속 묵상해 오면서 종종 시편 기자의 기도의 패턴(pattern of prayer)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과거의 주님의 행하신 일을 기도하는 가운데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편 기자의 기도 습관이라고나 할까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베풀어 주신 은총들을 되새겨 보는 기도 습관을 조금씩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편을 묵상하기 전에는 주로 과거를 뒤돌아보는 습관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런 저런 과거의 힘든 상황들과 안 좋은 추억들 등 사람의 썩은 냄새가 나는 죄악 된 기억들과 제 자신의 하지 못함과 죄를 범한 행함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았는데 시편을 묵상하면서 성령님께서 초점을 바꾸고 계십니다. 이제는 성령님께서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 때 참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낙심됐을 때 어떻게 저를 건져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행하심에 초점을 맞추게 하십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초점을 맞추어 저로 하여금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간구케 하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 시편 143편 5절에서 다윗이 압살롬의 핍박으로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그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했을 때 분명히 시편142편 말씀의 배경인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 왕의 핍박 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두 사건이 얼마나 비슷합니까?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 묵상한 시편 142편이나 오늘 본문인 시편 143편이나 다윗의 심령은 속에서 상해 있었고 참으로 비참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비슷한 상황들이 우리 삶 속에 반복되는 것은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 좋은 예로 저는 요한복음21장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15, 16, 17절) 물어보실 때 그 상황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하고 너무 흡사하였습니다. 어떻게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다 두 상황 다 “(숯)불”이 있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가 그 가운데 앉았더니"(눅22:55). 분명히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시고 그 위에 생선을 놓으시고 떡도 준비해 놓으시고 육지에 내린 제자들 중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과거의 불 가운데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부인했었던 자신의 죄가 기억이 났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상황을 재현하시므로 베드로의 죄책감에서 건져주시사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요 섭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처럼 현재 삶 속에 고통과 역경으로 인하여 우리의 심령에 속에서 상하고 마음이 참담할 때 과거의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현재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힘든 상황 가운데 놓여 있을지라도 과거에 지금 현재 상황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되새기며 묵상하는 가운데 현재의 상황 속에서 기념할 수 있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과거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셔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어떠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과거의 주님의 행하심을 기억하며 묵상하므로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다윗은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43편 6절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다윗은 그의 원수의 핍박 가운데 그의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절망적이고 괴로운 참담한 마음 가운데 그의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여 그에게 손을 펴고 간구하였습니다. 주님께 간구하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시길 기대하였습니다(7절). 그만큼 절박한 상황 이였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을 오늘 본문 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기도에 대해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의 기도의 삶에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다윗은 자신의 불성실함(unfaithfulness)과 불의(unrighteousness)를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실(Your faithfulness)와 주님의 의(Your righteousness)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3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그의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마음이 참담할 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상황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보데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진실)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 시편 142편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며 나아가자고 권면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 143편에서도 다윗의 기도를 볼 때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신실(진실)하심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 습관이 돼야 할 것임을 교훈 받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 우리의 본능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가 당면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인지도 모르고 불평과 원망하기가 쉽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성실함과 불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진실)하심과 의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2)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그렇게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마음이 참담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3편 8절을 보십시오: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심령이 속에서 상하여 마음이 속에서 참담한 가운데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실(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간구하는 가운데 그는 아침에 자기로 하여금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왜 그는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을까요? 다윗이 주님을 의뢰하여 주님께 간구하면서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은 주님의 뜻을 배워 그 주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10절). 그래서 그는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8절)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을 때 그 징계로 인한 고통과 고난으로 인하여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마음이 참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윗처럼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가야할 길을 깨달아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U-turn해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릇행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였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진실(신실)하심과 그의 의를 의지하여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주님이 원하시는 진실과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3)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3편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 심령이 상하였고 마음이 참담하였을 때 그는 주님께 피하였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묵상한 시편 142편에서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도 주위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피난처가 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하지 않고(142:4) 오직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께(5절) 피하였던 것처럼 오늘 본문 시편 143편에서도 그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께 피하여 숨어 그의 원수들에게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3편 11절에 다윗의 구원의 기도를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이렇게 하나님께 다윗이나 우리가 간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돌이킬 때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4)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심판해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3편 12절을 보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다윗은 자기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원수들을 다 끊으시고 멸해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주님의 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은 주님의 종이지만 다윗의 원수들은 주님의 종이 아니기에 선택받은 주님의 종을 주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으로 기억하시고 보시사 자기는 구원해주시고 악인은 멸해 주시길 간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돼야 합니다. 주님 인자하심 따라 주의 선택받은 종은 구원해 주시고 주님의 종이 아닌 선택받지 못한 우리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멸해 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사랑)과 공의가 들어나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과 심판 혹은 심판을 통한 구원으로 인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라도 시편 기자 다윗처럼 과거의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기억하면서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기억하며 기도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