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시편 142]

 

 

여러분, 요즘 고통 거리들이 혹시 많지는 않으십니까? 인생은 가시덤불처럼 이런 저런 고통거리들로 이리 저리 엉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걱정과 스트레스 속에서 이런 저런 병이 걸려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가시덤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엉키고 엉켜서 참 우리들의 마음을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생각도 들곤 합니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는가?’ 참으로 가시덤불과 같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가?’ 질문을 던져 볼 때 저는 그 원인을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원인은 ‘세상과 염려와 재리의 대한 유혹’ 때문입니다(인터넷).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세상적인 유혹에 빠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이런 저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엉키고 엉켜서 괴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그 엉킨 것들을 풀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엉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 시편 142편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가시덤불처럼 이런 저런 고통거리들이 엉키고 엉켜 있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여기서 “내 원통함”이란 히브리어 원어로 “시아크”인데 그 단어의 뜻은 “덤불”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 “덤불”이란 말은 다윗의 삶에는 고통거리들이 한 둘이 아니어서 가시덤불처럼 얽혔으므로 질시할 지경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왜 다윗은 이렇게 질시할 지경에 놓여있을 정도로 고통 거리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박윤선). 핍박을 받데 사울은 다윗의 행하는 길에서 그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겨 놓기까지 하였습니다(3절). 결국 사울 왕은 다윗의 생명을 끊으려고 찾고 있었고(삼상18-24장),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22:1). 보기에는 다윗의 상황이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면 소망이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MacArthur).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면 소망이 없어 보이는 다윗의 아주 절박한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오늘 본문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나는 심히 비천하나이다.” 즉, 다윗은 사울의 핍박으로 인하여 심히 비천해지고 약한데 놓여 있었습니다(6절, 박윤선). 이러한 다윗의 심히 비천하고 연약한 상태는 외부적으로는 그는 현재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있었습니다(7절).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다윗의 심령이 속에서 상해있었고 또한 원통함이 있었습니다(2, 3절).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다윗은 전적으로 버림받은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다윗은 아무리 주위를 돌아보아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면서 신경을 써 주는 사람들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참 처량한 신세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주위에 모든 것을 차단하시는 듯 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상한 심령과 애통하는 심령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기도로 쏟아 내길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다윗은 그가 처한 비천한 자리에서도 낙심치 않고, 도리어 소망 중에서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모든 사정을 기도로 다 쏟아냈습니다(박윤선). 3절을 보십시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이 다윗의 기도를 보면 그는 자기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해내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자기의 마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심령이 속에서 상해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원통함이 있었기 때문에(2절) 마음에 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정을 마음에 하나님께 쏟아 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윗의 기도에 대하여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5절에서 7절까지의 다윗의 기도 내용을 한 3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들에게 적용하길 원합니다.

 

첫째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기도였습니다.

 

성경 시편 142편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다윗은 그의 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며 나아갔습니다. 곧, 그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분깃”이라는 신념으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기 우편을 둘러봐도 자기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자들도 없었을 때(4절) 참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상해있고 우리 안에 원통함이 있을 때 여기 저기 주위에 사람들에게 쏟아내어도 과연 여러분은 그들이 여러분의 피난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십니까? 사람들을 피난처로 삼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 같습니다. 연약하여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비참한 가운데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우리 주님만이 저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우리의 상한 심령을 위로해주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만 믿고 고백했던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나의 분깃”으로 믿고 인정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의 분깃”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그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그래서 우리는 가끔 찬송가 82장을 이렇게 부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 우리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 우리의 애통함을 가지고 또한 우리의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 간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성경 시편 142편 6절을 보십시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다윗은 자신의 심히 비천한 상태에서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 왕에게서 건져주시길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 왕과 그의 무리들은 자기보다 훨씬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심히 연약해져 있었기에 다윗은 자기의 심히 연약한 가운데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종종 고통과 역경 가운데 주위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 속에서 저는 복음성가 “약할 때 강함주시네”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이런 저런 일들로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할 때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의 강하신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약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강한 속사람의 모습을 엿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심히 연약해 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심히 연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할 때 하나님의 강하심을 의지하여 그 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다윗의 기도는 주님께서 그를 후대하실 줄 확신하는 기도였습니다.

 

성경 시편 142편 7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다윗은 비록 지금 사울 왕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 있지만 그 감옥과 같은 굴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 내실 줄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구원의 확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사울의 손에서 거지시사 의인들로 하여금 그를 두르게 하실 줄 믿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다윗은 우편을 보아도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자기를 돌아보는 자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5절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면서 주님께 기도로 피하는 가운데 7절에 와서는 그를 돌아보는 의인들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다윗은 후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116편7절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의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 주님의 후대하심을 믿고 간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평안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아 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므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은 근심된 일이 많고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죄악 된 일도 많고 죽을 일도 많습니다(찬송가474장).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은 마치 가시덤불과 같습니다. 이런 저런 고통스러운 일들로 엉키고 엉켜서 우리의 심령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애통함을 어느 누구에게도 쏟아낼 때도 없는 외로움도 우리는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 다윗처럼 우리의 심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내되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 되십니다. 그 피난처와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께 건져달라고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되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내 길을 아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장인 어르신 첫 번째 수술 가운데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을 드렸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