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그러나 주님내 눈은 주님께 향합니다.

 

 

[시편 141]

 

 

여러분은 삶 속에 난관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무리 해도 일 해나가기가 어려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지난 주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시편 62편 1, 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소망)이 그에게서(저로 좇아) 나는도다.” 어떻게 난관을 당했을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볼 수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잠잠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사30:15). 왜 우리는 난관 속에서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소망)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시62:1, 5).

 

오늘 성경 시편 141편 7, 9, 10절을 보면 우리는 시편 기자 다윗은 그의 원수들인 악인들로 말미암아 난관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당하고 있었던 난관들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의 동무들도 원수들에게 유린을 당하고 있었습니다(7절, 박윤선). 다윗의 원수 악인들은 다윗을 잡으려고 올무와 함정, 그물을 놓아(9-10절)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7절). 이러한 난관의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한 5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눈은 오직 주님께 향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141편 8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한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8절을 시작하면서 “그러나”(But)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난관의 상황에서 “그러나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대하는 관망을 말합니다(박윤선). 성도가 고난 중에서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행동 그것이 벌써 기적이니, 어찌 그 믿는 데로 되지 않겠습니까(박윤선).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 우리가 낙심치 않고 어떠한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 눈이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기보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충분히 건져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으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이 다윗의 눈이 주님께 향하는 모습을 생각할 때 저는 히브리서 12장 2절 상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우리가 난관을 당했을 때, 역경과 곤란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오직 주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 앞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앞에 홍해 바다와 뒤에 좇아온 애굽 군대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움 가운데서 원망하며 불평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우리의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시121:1.2).

 

둘째로, 다윗의 손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성경 시편 141편 2절을 보십시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다윗은 난관을 당했을 때 그의 눈은 주님께 향하였고 그의 손은 주님께 드려졌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손이 주님께 드려졌다는 말씀은 다윗은 난관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심령을 받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그의 심령을 받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좀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다윗의 기도를 보면 “속히”라는 단어를 볼 때 그의 기도는 긴급한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의 기도 내용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을 사모하여 드려진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8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하여(9절) 그리고 악인을 심판해 주시길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라고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10절). 이러한 긴급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다윗은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께 받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되 그는 “항상”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5절). 그리고 그는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저녁 제사 같이 희생 재물처럼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박윤선).

 

과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는 저녁 제사와 같은 기도는 무엇일까요? 성경 시편 51편 17절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우리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 주시는 저녁 제사와 같은 기도는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죄를 깨닫고 자백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손을 들고 드려지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십니다.

 

셋째로, 다윗의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지 않았습니다.

 

성경 시편 141편 4절을 보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우리 사람은 난관을 만났을 때 우리의 눈을 주님께 향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의 영적 저항력이 없어져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가 쉬습니다. 결국 우리의 눈과 손이 주님께 향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취약해져 우리 마음이 악한 일(죄악 된 일)에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곤난한 때에 신앙의 절개를 변하여 악도들과 동화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우리는 결심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 우리는, 죽을지라도 그런 자들의 행위에 동참하지 말 것이다.”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즉 난관 속에서 영적으로 더 단련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지 아니면 영적으로 취약해져 하나님께 죄를 범하던지 말입니다. 고난의 통로를 통하여 영적으로 강해져 세상과 죄악과 더욱더 분리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던지 아니면 고난의 통로에서 영적으로 약해져 세상과 죄악과 짝지어 살면서 행악 자들과 동화되어 불신자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던지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왠지 적어도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난관과 역경 속에서 취약해져 악한 일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자신의 눈을 주님께 향하였고 그의 손은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또한 그의 마음은 악한 일에 기울어 죄를 범치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결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악인이 먹는 음식이 “진수”처럼 먹음직해 보일지라도 그의 눈은 오직 주님께 향하여 있었기에 안목의 정욕의 유혹에 그의 마음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손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깨끗함과 정결함을 추구하였기에 죄악을 행하는 자들의 악행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난관 속에서 유혹이 많을지라도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멈추어 집중하며 주님께 손을 들어 기도에 헌신하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넷째로, 다윗은 그의 입에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성경 시편 141편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는 곤고할 때,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통과 역경 속에서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 할 위험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적으로 취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우리는 말을 아껴야 합니다. 실제로 사탄의 역사를 보면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상황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기도케 하지 못하게 만들며 또한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죄악 된 일에 기울게 만듭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탄은 우리의 입술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케 만듭니다. 그 한 예로 욥기 2장 9절에 나오는 욥의 아내의 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말을 들은 욥은 그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10절). 욥은 자기가 당면한 난관 속에서도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치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이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잘 지켜 입술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결심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윗처럼 우리의 말이 사람들이 들을만하게 달아야 합니다(시141:6). 달게 말한다는 말씀은 상대방을 유쾌하게 해주는 말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의 골로새서 4장 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로 인하여 상대방은 은혜를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다섯째로, 다윗의 머리는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시편 141편 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나를 칠찌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찌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찌라 ….” 다윗은 난관 속에서도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책망을 은혜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난관 속에서 의인의 책망을 은혜로 여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곤란한 가운데 있을 때 주위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책망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책망을 받는다면 우리는 힘든 가운데서 마음이 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난관 속에서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책망을 은혜로 여겼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 비밀을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과 지혜. 첫째로, 겸손이라 함은 난관과 고통, 역경을 통해서 다윗의 눈이 주님께 향하여 고정되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겸손함이 다윗에게 있었기에 다윗은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고 은혜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잠언 기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9:8). 이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재로 느끼며 경험합니다. 거만한 자에게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을 할지라도 듣지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책망을 해도 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워합니다. 그래서 거만한 자에게는 책망을 하기를 기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에게는 간접적으로 아니하고 직접적으로 책망을 해도 듣고 고치도록 노력하겠다 하면서 감사해 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책망을 듣는 그 처음 순간에는 속으로 기분이 상했을지라도 나중엔 진심으로 감사해 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지혜 있는 자에게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경험합니다(8절). 다윗에게는 이러한 겸손과 지혜가 있었기에 난관 속에서 의인의 위로가 아닌 책망도 그의 머리로 거절치 아니하고 오히려 은혜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바라기는 어떠한 난관과 역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찌라도 우리의 눈은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손을 주님께 올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을 잘 지켜 악한 일에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십시다. 책망을 받을지라도 거절하지 말고 은혜로 여기십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눈을 향하시고 귀를 기울이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이어져 그 분의 말씀을 나의 입술로 전파하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전파한 말씀이 다시 내게 돌아와 면책함을 경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