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

 

 

월요일 저녁, 잠들기 전, 저는 아이들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이들 셋 다 책을 읽고 있는데 유난히 막내 예은이가 소리를 내면서 침대에 누워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예리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착하다고 얘기해 주면서 열심히 책 읽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리는 이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책을 주목하여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다음 저는 막둥이 예은이에게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착하다고 얘기해 주면서 열심히 책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도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가 보다 하고 제 방으로 와서 성경책을 읽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예은이가 물병을 입에 물고 제 방으로 오더니 제 침대 옆 탁상에 놓여 있는 기독교 책 하나를 보더니 이 책 읽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은이에게 가끔 읽는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금 이 아빠는 성경책을 읽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가 기독교 책을 펴 보더니 줄이 거 있는 것을 보고 왜 책에서 줄을 그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빠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그렇게 줄을 근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들고 있었던 제 성경책을 보여주면서 여기에다가도 아빠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줄을 긋는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는 기독교 책을 가리키면서 이 책은 줄을 거도 되지만 성경책을 줄 그면 안 된다고 제 성경책을 가리키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지, 그렇다고 성경책에 낙서하면 안 된다는 것도 가르쳐 줘야 하는데… 생각하다가 이 아빠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 말한 뒤 제가 읽고 있었던 성경 이사야 8장17절을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경 구절에 줄이 거 있었기 때문입니다: “I will wait for the Lord, who is hiding his face from the house of Jacob. I will put my trust in him”(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예은이가 읽더니 “the Lord”(주님)이란 단어가 나오니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줄을 거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ㅎㅎ 그래서 제가 예은이에게 그 성경구절 영문에 쓰여 있듯이 ‘너는 주님을 trust(신뢰)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가 “yes”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동일한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trust(신뢰) 하십니까? 만일 “예”라고 대답하였다면 ‘왜 여러분은 주님을 신뢰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시편139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신뢰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배우는 가운데 우리 주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39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한 마디로, 저와 여러분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은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므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행동과 존재를 아시고 계십니다(1-4).

 

성경 시편 139편 1-4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앉고 일어섬과 자기의 생각도 알고 계시며(2절) 자기의 모든 행위도 익히 알고 계시며(3절) 또한 자기의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4절).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의 언행이나 심사나 동정의 일체를 다 아실 수 있으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만드셨기 때문에 다윗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14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였기 때문입니다(14절).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심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어제 성경책 욥기서를 읽다가 욥기 7장 17-20절 상반절 말씀에서 잠시 머물러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하고 너무나 연관이 되는 말씀이라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욥은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님께서 크게 여기사 우리에게 매우 큰 관심을 가지시고 주목하시는지, 그리고 순간이라도 우리를 주목하심에 있어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는지, 그는 주님을 가리켜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앉고 일어섬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시며, 우리가 말을 하기 전에도 우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 신기하고 오묘하게 만드셨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전지하신 하나님, 우리를 감찰하시사 우리의 모든 행동과 존재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가 없습니다(5-12).

 

성경 시편 139편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God’s omnipresence)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써 동시에 어디든 계실 수 있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제일 잘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렘23:23,24, 암9:2). 우리는 하나님의 감시를 피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나 우리를 포위하신고로 우리는 그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손이 항상 우리를 붙드시고 계신고로 우리는 그 분의 관하에서 이탈할 수도 없습니다(5절, 박윤선). 이것은 다윗은 조금이나마 이 사실을 체엄 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절). 그는 편재하신 하나님에게서 피할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음을 하늘에 있을지라도, 음부에 있을지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하고 있을지라도 그리고 흑암 가운데 있을지라도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8-12절). 그래서 그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7절).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29:15).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13절) 어두운데서 죄악을 범하면서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라고 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화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편재하심 속에서 숨어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거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으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편재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참 축복입니다. 그 축복은 예를 들어 시편121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며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실족치 않게 하십니다(3절). 이 하나님을 우리는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최고의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17-18).

 

성경 시편 139편 17-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를 제일 잘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자기를 제일 사랑하셔서 모든 관심과 주목을 자기에게 해 주고 계시는 가운데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의 수가 모래보다 많은 것에 대해야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잠에서 깰 때에도 편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면서 자기를 향하신 생각이 수다함을 깨닫는 다윗의 마음은 어찌했겠습니까? 모든 관심과 초점(주목)이 다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윗의 마음, 하나님이 보배로운 사랑에 다윗은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4절). 그러한 감사 속에서 다윗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을 제일 사랑하시사 다윗의 원수들, 곧 하나님의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과 더불어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자시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특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제일 잘 아시고 또한 제일 사랑하고 계시는 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자기를 구원해 주실 줄 확신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편 139편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부족하나마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기에 저 같은 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들이 모래사장의 모래알들처럼 셀 수가 없다는 이 사실, 생각만 해도 힘이 되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인데 왜 하나님은 저 같은 자에게 셀 수 없는 생각으로 생각해 주시며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은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를 제일 잘 아시고, 우리를 제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 주님에게서 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기도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절).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전지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아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하시사 우리의 뜻을 아옵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며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뜻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삶 속에 아무 악한 행위도 없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나를 감찰하시고 제일 잘 아시며 또한 제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 같은 죄인에게 최고의 관심을 두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