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최고의 기쁨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시편 1376).

 

 

저는 헨리 나우웬의 책을 다시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Self-rejection"(자기 거절)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마음에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저는 '자기 부인'(self-denial)과 '자기 거절'을 혼동하는 신앙생활을 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때에 자기 거절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상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이 겸손인 줄 착각하고 자기를 거절하는 신앙생활을 하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충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 이 단어는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를 거절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을 모른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때에 우리는 자기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오히려 죄악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상당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자아는 건강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크리스천의 자기 사랑'이란 책 제목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우리에게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자기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아 기형아'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건강하지 못한 자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위선의 능력(?)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선적인 삶의 죄책감에부터 다양한 죄책감들에 병들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학대하는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이 겸손인줄 알고 착각하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불쌍한 자녀들일까 생각해 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들의 삶일까 의문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 성경 시편 137편 6절 말씀을 통하여 받는 도전은 시편 기자는 자기의 최고의 기쁨보다 주님을 더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가 건강한 자아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최고의 기쁨(God's chief joy)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기뻐하였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음 성가 하나가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고백하는 찬양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심을 아는 자라 생각합니다. 그 기쁨과 사랑에 충만한 자는 자기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웃을 건강한 자아로 사랑할 줄 아는 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최고의 기쁨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이 세상의 최고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