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

 

 

[시편 13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보다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삼상16:7). 이 사실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자 사무엘을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집으로 보냈을 때의 성경 이야기입니다(16장).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해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을 왕을 찾는 가운데 이새의 여덟 아들 중 첫째 아들인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라고 말합니다(6절).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벼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 우리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의 외모보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중심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질문의 대답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중심에서 찾습니다(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중심은 한 마디로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이었습니다(시131:2).

 

오늘 성경 시편 131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 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내 중심이 젓 뗀 아이와 같도다”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히브리 사람들은 아이들의 성장 단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성장 단계를 한 다섯 단계로 봅니다(주석). (1) 제일 첫째 성장 단계는 “suckling”, 즉 “젖먹이”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태어나서부터 30일 정도까지를 가리킵니다. (2) 두 번째 성장 단계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젖 뗀 아이”(weaned one)입니다. 이 단계는 한 달에서 한 5년까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 아이들은 한 3-4살 되어서야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 (3) 세 번째 성장 단계는 “toddler”, 즉 “아장아장 걷는 아이”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한 5살에서 20살까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4) 네 번째 성장 단계는 사춘기(puberty)입니다. 이 단계는 히브리어로 “elem or almah”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성숙한 젊은 사람을 말합니다. 아마 이 단계는 20살 이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5) 그 다음 단계는 아마 어른(adulthood)과 늙어가는(old) 단계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자기의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다고 말씀한 것을 이 성장 단계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젖 뗀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더 이상 젖을 달라고 울며 보채지 않고 엄마의 품 안에 안겨 엄마의 얼굴을 보며 만족해하는 젖 뗀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자기의 중심을 젖 뗀 아이에게 비교한 것입니다. 즉, 다윗이 자기의 중심을 젖 뗀 아이에 비교한 이유는 마치 젖 뗀 아이가 젖을 더 찾아 울지 않고, 그저 그 어머니를 소유한 사실로 인하여 만족한 것처럼(박윤선) 시편 기자 다윗의 마음은 그저 하나님 한 분으로만 만족하는 심정 이였기 때문입니다.

 

복음 성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라는 곡 가사를 보면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 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이 찬양은 성경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근거해서 쓰인 가사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다윗은 그의 중심이 젖 뗀 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 한분으로만 만족하였습니다. 우리의 중심도 이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중심이 다윗처럼 젖 뗀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때에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더 이상 하나님 한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을 쳐다 볼 때가 많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성경 사무엘상 18장 9절 말씀에서 나오는 ‘질투의 눈’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어 성경에는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을 보면 ‘그 날 후로 사울이 질투의 눈으로 계속 보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 즉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6절)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고 하므로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라고 말한 날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9절). 이러한 죄악 된 질투의 눈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과연 이러한 죄악 된 질투심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그 비결을 저는 성경 시편73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시편 기자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인들의 결말을 깨닫고 더 나아가서 주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여 이 땅에 사모할 자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적인 질투심을 극복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투의 눈으로 주님만 바라볼 때에 우리는 사울과 같은 죄악 된 질투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족한 은혜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고후12:9).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시편 131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온전히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은 교만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즉,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은 겸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다윗은 그의 눈을 높은데 두지 않았습니다. 즉, 다윗은 세상 영광을 높이 탐하지 않았습니다(박윤선). 왜 그랬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제일 높으신 주님에게 시선을 멈추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높으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주님보다 그 무엇이 높겠습니까. 다윗은 교만한 자들처럼 세상에 높아지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훨씬 높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박윤선). 그러기에 그는 “큰 일”과 자기가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관련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 다윗은 교만하게 자기의 사명이 아닌, 어떤 큰일을 허욕으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박윤선). 우리도 다윗처럼 이 세상에 헛된 욕심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헛된 영광을 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즉, 우리는 허영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윗처럼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중심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습니다. 즉,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은 하나님 한 분으로만 만족하기에 그 심정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요함과 평온함은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야망과 기타 뜨거운 격동을 진압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데서 획득한 생활입니다(박윤선). 이러한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을 다윗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이 교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불만과 기타 격동된 심리를 진정시켰습니다(박윤선). 그는 세상 욕심에 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3절). 왜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시니 우리가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23:1). 우리 모두 젖 뗀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십시다. 결코 욕심에 이끌려 세상 것들을 추구하지 마십시다. 결코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에 교만하게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겸손히 우리 자신을 스스로 낮추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고요하고 평온케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젖 뗀 아이와 같은 중심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