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합시다!

 

 

[시편 119113-120]

 

 

성경은 "예"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를 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분명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가 어쩔 때는 "아니오"가 될 수 있고 또한 "아니오"가 어쩔 때는 "예"가 될 수도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실 때 "예"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예"는 해놓고 행동은 "아니오"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의 불순종하면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꾸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말씀대로 "아니오"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젠 "예"하면서 받아들이면서 죄를 범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얀색과 검은색 보다 회색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말씀 순종의 삶은 사랑하며 세상의 죄악을 미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갈멜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왕상18:21). 지금 우리는 뭔가 분명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는 분명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긋고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시편 119편의 시편기자는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했고 "주의 법"은 사랑했습니다(113절). 우리가 시편 기자처럼 이러한 분명한 선을 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을 긋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회색지대'에서의 삶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회색지대에서의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도 아니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면 이 세상에서 문안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색깔이 분명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 우상이면 우상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기자의 분명한 사랑의 대상과 미움의 대상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또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먼저 시편기자의 사랑의 대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119편 113-120절을 보면 우리는 시편 기자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 주님이 사랑의 대상 이였기에 주님의 말씀 또한 사랑의 대상 이였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어떠한 삶을 사는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그는 주님의 말씀에 항상 주의합니다.

 

오늘 본문 11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주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중요시 여겼습니다.

 

(2)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오늘 본문 1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기키리로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21절을 보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중요시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킵니다.

 

(3)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114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다보면 사탄의 공격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주님을 우리의 "은신처"와 "방패"로 삼아(114절) 그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소망을 둬야 합니다(116절).

(4) 그는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바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116-117절을 보십시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 나를 붙드소서 …."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중요시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우리는 사탄의 공격과 위험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은신처와 방패가 되시는 주님의 품 안에 거하면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바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116절) 또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117절).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바 되면 그 말씀대로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며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기자의 미움의 대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미움의 대상은 "두 마음 품은 자"였습니다(113절). "두 마음 품은 자"는 누구입니까? 성경 야고보서 1장 6-8절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의심하는 자'를 가리켜 두 마음을 품은 자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닌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얼마나 의심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8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두 마음을 품음을 미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113절 문맥 속에서의 "두 마음 품는 자"는 한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두 마음 품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1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 사랑의 대상이 주님이요 주님의 말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떠난 자들, 즉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다 멸시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18절). 이들은 궤사를 일삼는 자들로서 허무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떠난 자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2) 두 마음 품는 자들은 행악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115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너희 행악자여 ….” 주님의 말씀을 떠난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은 당연이 행악을 일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행악 자들을 미워합니다.

 

(3) 두 마음 품는 자들은 악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119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 주님이 사랑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을 미움의 대상으로 분명히 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사 선택한 우리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1:25).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까? 악인들은 찌끼같이 버리시는 하나님께서 그 찌끼를 지니고 있는 우리는 온전히 청결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온전히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혼동하여 찌끼 같은 인생을 살며 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잡 물"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대상과 미움의 대상을 섞어서 회색지대에서 안주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뜨거우면 뜨겁던지 차가우면 차가와야지 우리는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과 미움의 대상을 선택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찌끼 같은 인생을 온전히 정결케 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하는 신앙생활을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