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스스로 위로하라!

 

 

[시편 11949-56]

 

 

오늘 미주 기독교 신문에 PCUSA 교단에 소속된 큰 한인 교회가 분열된 소식을 접해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PCA 교단에서도 이미 큰 교회였던 한인 교회가 갈라져서 한 교회 건물에서 둘로 나뉘어져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PCUSA 대형 교회도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걱정이 됩니다. 특히 상처 받을 형제, 자매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교회가 치유 받는 곳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처 받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더욱더 사랑의 불타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 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의 불타는 위로 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오래 전부터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랑하는 저희 교회 영어사역 전도사님의 사임으로 말미암아 아픔과 눈물 속에서 제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 지금 오늘 본문에 비추어 뒤돌아 볼 대에 "어떻게 하면 목회자가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영적 자력'을 키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가 스스로 위로하지 못하면 주님이 맡겨 주신 양떼들을 위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엔 사람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부(refused to be comforted)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그 아픔과 괴로움이 커서 우리 자신이 견디지 못할 때에 우리는 자포자기할 위험이 충분히 있습니다. 스스로 더 낙심하며 더 실망하여 더 아프게 하면서까지 괴로움과 상처 속에서 거하기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기자는 "곤란 중"(시119:50)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위로하였”습니다(52절).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시편 119편 49-56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시편 기자처럼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울 것인지 그 해답을 오늘 본문 중심으로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우기 위해서 꼭 하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교만한 자로 하여금 우리 영혼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교만한 자가 자기를 "심히 조롱"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1절). 그 교만한 자의 악한 의도 혹은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목적은 시편 기자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51절). 이 얼마나 무서운 사탄의 계략입니까. 마치 악한 사람이 물고기를 어항에서 끄집어내어 죽이려는 것처럼 사탄은 우리를 말씀의 어항에서 끄집어내고 죽이려고 교만한 자를 사용하여 우리를 심하게 조롱합니다. 그 교만한 자의 심한 조롱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시편 14장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 ." 특히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곤란 중에 있을 때 어리석게도 교만한 자의 조롱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 고통 중에서 건져 주시지 않는 것인가?', '왜 내가 이러한 아픔과 상처를 입어야 하는가?' 라고 말하는 경향을 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 때문에 하면서 사람과 환경과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그러면 에서 우리는 곤란 중에 우리의 교만함이 들어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그의 도우시는 손길을 거부하며 우리가 당면한 고통과 환경으로 하여금 우리 영혼을 지배하도록 방관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는 경향을 우리의 곤란 중에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그 곤란 당시에는 보지 못하고 멍하게 하루하루를 고통과 아픔과 눈물 속에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말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동역자의 사임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 멍하게 아픔과 눈물 속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말씀과 기도 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말씀으로 하여금 제 마음을 주장케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는 멍하게 하루하루 약 3주를 보냈습니다. 결국 사탄은 고통과 아픔, 괴로운 일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잊게 하므로 말미암아 영적 치매 증세를 나타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나 자기 자신을 더욱더 낙심케 하며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결코 사탄으로 하여금 교만한 자의 조롱을 사용하여 우리의 영혼에게 말하는 것을 경계하며 막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영적 자력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로 꼭 해야 할 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119:49, 52, 55).

 

시편 기자는 주님의 "옛 규례"를 기억하므로 스스로 위로하였습니다(52절). 여기서 "옛 규례"란 오래전부터 참된 것으로 드러나 있고 견고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즉, 시편 기자는 그의 과거의 삶 속에서부터 참된 것으로 드러났고 견고히 서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승리장로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 18절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을 곤란 중에 기억하면서 약 1년 5개월 동안 주님께서 신실하게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승리장로교회를 이모저모로 세우셨던 증거들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참된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말씀(주님의 약속의 말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시119:50).


우리는 너무나 앞만 바라보면 분주하게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목표와 성공 등등을 추구하면 열심히 달려가다가 시편 기자처럼 곤란이나 역경을 당면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곤란을 통하여 나보러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아 주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아가셨는지 발자취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구나.' 우리는 너무나 앞만 바라보면서 정신없이 분주하게 달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허락하시는 곤란은 유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71절). 뒤를 돌아보는 시간, 그러나 과거의 아픈 상처나 안 좋은 추억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의 발자취를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밤"(55절)에, 우리의 마음이 어둡게 하는 고통과 아픈 일들이 계속 몰려 올 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욱더 기억하며 붙잡아야 합니다.

 

(2) 둘째로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우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49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주님께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그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붙잡으면서 주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있죠? 그 말씀을 꼭 기억해 주세요.' 물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잊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곤란 중에 잊어버릴 때가 많은 뿐입니다. 시편 기자가 주님께 간구하면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 이유는 지금 그에겐 그 약속의 말씀만이 주님께서 그로 소망이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극심한 곤란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의 빛이 더욱더 소망 차게 발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극심한 어두움 속에서 빛이 더욱더 환하게 비춰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시편 기자처럼 큰 고통과 아픔 중에서 엎드려 주님께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데 소망이 없음을 극심한 곤란과 고통을 통해서 피부로 느끼고 알게 되었기에 오직 소망은 주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뿐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주님께 홀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 것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외로운 영혼을 고독의 동산에서 소망의 말씀으로 간구하는 가운데 소생시키며 부흥시키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3) 마지막 셋째로 꼭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법도(계명)를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극심한 곤란 중에 있더라고 주님의 법도를 떠나지 말고 오히려 그 법도를 더욱더 잘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계략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가운데 기도로 영적 파워를 얻어 말씀 실천에 앞장서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법(도)를 지켰습니다(55, 56절). 더 나아가서, 그는 주님의 법도를 지킨 것이 가지의 소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56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듣고 배우는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시편 기자는 곤란 중에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편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성에 이끌려 주님의 계명대로 실천하며 살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곤란과 고통, 아픔과 상처를 주고받고 살아갑니다. 특히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고통과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는 이러한 "곤란"을 유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시편기자처럼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영적 자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나바처럼 진정한 위로자의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스스로 위로하는 영적 자력을 키우는 "곤란"의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다시금 사랑의 불타는 위로자로 세워주시는 주님께 수요기도회 때 간구를 드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