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

 

 

[시편 11925-32]

 

 

어떤 목사님이 성도의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분명 인기척이 있는 듯 한데 아무리 노크를 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무시하나 싶어 서운하게 생각한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메모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다음 주일이었습니다. 심방을 받았던 그 성도도 같은 방법으로 목사님께 쪽지를 건넸습니다. 성경 말씀을 찾아본 목사님은 그만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그 성경구절은 바로 창세기 3장 10절이였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인터넷). 이 한 예화를 읽고 웃으면서 한 가지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 적용입니다. 어느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한 목사님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최대 문제는 이론은 넘치는데 적용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지식은 넘쳐나는데, 교회마다 성경공부 시간은 넘쳐나는데, 기독교 서점에 가도 얼마나 좋은 신앙 서적이 많은데 문제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글을 읽으면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적용해야 할 것을 도전받았습니다. 그러면 말씀 적용이란 무엇입니까? “말씀을 꼭 붙들고 그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마음의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이 묵상이라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 이 바로 '적용'입니다”(인터넷).

 

저는 오늘 성경 말씀 시편 119편 25-32절 말씀 중심으로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다!”란 제목 아래 한 3가지 교훈을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적용하길 원합니다. 두 가지 기도 제목과 한 가지 헌신을 도전받길 원합니다.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감에 있어서 첫 번째 기도제목은,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입니다.

 

성경 시편 119편 27절을 보십시오: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이 시대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성경 마가복음 4장12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 왜 이 시대는 깨달지 못하는 시대입니까? 그 이유는 이 시대가 악을 가까이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욥기 28장28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이것을 성경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좀더 자세하게 적용을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속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약1:27). 우리는 날마다 이 세상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벧후2:8) 이러한 상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속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세속화되는 것으로부터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들어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이사야 44장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었던 오늘 본문 시편 119편에 나오는 시편기자는 주님의 법도의 길을 깨닫길 원했습니다(시119:27). 그는 불법의 길을 많이 보고 듣고 피부로 느끼는 상황에 있었을 때(벧후2:8) 그 불법의 길을 걷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또한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시119:26). 시편 기자는 자기의 난관 많은 앞길을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한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26절). 기도응답을 통하여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깨닫길 원했던 시편기자는 세상의 불법의 길을 걷기보다 주님의 법도의 길을 깨달아 알아 그 주님의 길을 걷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주님의 기사를 묵상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27절). 그는 주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기사”)을 묵념하며 음미하고자 주님의 법도의 길을 깨달길 원했습니다(박윤선).

 

주님의 말씀의 아름다움을 맛보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을 보고 들으며 묵상하는 가운데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성경 구절 한절 한절의 단 맛을 보는 한해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가 시편 119편103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감에 있어서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주님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입니다.

 

성경 시편 119편 28절을 보십시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시편 기자의 이 두 번째 기도는 어느 상황에서 드려졌습니까? 그는 자기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고 있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환난과 곤고로 인하여 시달리고 있었을 때(박윤선), 또한 그의 영혼이 고난으로 슬퍼하고 있었을 때(칼빈) 주님의 말씀대로 세움을 받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환난과 곤고로 시달리고 그의 힘이 물처럼 다 쏟아져 없어졌을 때 그 연약해진 심령을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무거움은 마치 양초가 녹아져 낭비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녹여 허비하게 만듭니다. 회개하는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눈물로 그 마음이 녹여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하는 영혼조차도 환난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녹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께 간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시편 기자의 기도 상황을 25절에서 우리는 좀 더 설명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이 말씀은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모든 무가치한 것들로 인하여 그 영혼에 소망이 사라져 갈 때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과연 시편 기자는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였습니다(25절). 이 얼마나 말씀의 단 맛을 아는 시편기자의 기도입니까?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쓴 맛들 밖에 없음을 알았던 시편기자, 환난과 곤고로 인한 시달림과 이 세상의 모든 무가치한 것들로 인하여 그의 영혼에 소망이 사라져 갈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연약해지고 소망을 잃은 영혼을 다시 소생케 하며 힘있게 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침체되고 낙망한 영혼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히4:12).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다가 지쳐 쓰러질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18절인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는 마음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잠언 24장16절 상반 절 말씀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 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바라기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더욱더 세움을 받는 새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모든 것이 무가치한 이 헛되고 헛된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환난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물처럼 녹아내려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그 말씀의 능력을 내가 가장 연약할 때 경험하는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있길 기원합니다.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감에 있어서 한 가지 적용은 내가 주님의 말씀에 헌신하리이다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떻게 말씀에 헌신을 하였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시편 기자는 성실한 길을 택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시편 기자는 불성실한 길들이 그의 앞에 많이 놓여 있었을지라도 그 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29절).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내리면 살아가고 있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진리의 길 아니면 거짓의 길. 그러나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은 너무나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길과 거짓의 길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진리로 여기며 거짓의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으면서도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리와 거짓의 길을 분별하면서도 거짓의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진리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단 맛을 본 시편기자, 그 말씀으로 세움을 받는 경험을 한 시편기자는 성실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그 길을 자신의 삶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30절).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성실한 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걷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2)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에 밀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3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실한 길을 택하여 걸으면 되는데 거짓 행위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치를 당합니다(29-30절). 이와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치를 당치 않고자 주님의 말씀에 밀접했던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에 굳게 애착하였습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붙어있었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할 때에 우리는 거짓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3) 시편 기자는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 3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 시편 기자는 거짓된 길이 아닌 성실한 길을 택하여 걸었으며 또한 주님의 말씀에 밀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넓히실 줄 확신하였기에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라는 말은 ‘초점을 맞추어 직선의 움직임을 만들되 그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신속하며 열성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말씀으로 향하는 달려가는 자는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더욱더 넓혀 주실 것입니다(예: 왕상 4:29). 시편 기자가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시119:32).

 

우리는 주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실한 길을 선택하는데 헌신해야 하며 주님의 말씀에 밀접 하는데 힘써야 하며 또한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헌신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주 말씀 향하여 달려 나가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