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
[시편 117편]
오늘 새벽 기도회 때 성경 베드로후서 2장 8절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롯처럼 보고 듣는 것이 죄악 된 세상의 음란한 행실(7절)과 불법한 행실로 인하여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9절).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건지시고(구원해 주시고) 악인은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며 바라봐야 합니다. (2) 우리는 굳센 믿음 가운데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3:17). 거짓 선생들(2:1)은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14절) 또한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18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혹되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3) 이 죄악 된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죄악 된 일들로 인하여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이 작아지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상한 심령을 싸매어 주시고 치유해 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파한 후 오전에 신문을 보니까 한국 청년 한 명이 자기의 친구를 총으로 여러 번 쏴서 죽인 후 시체를 L. A. 다저스 야구장 가는 고속도로 110번 근처 어디엔가 버린 후 나중에 도박을 하다가 용의자는 잡혔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멀쩡하게 생긴 젊은 한국 청년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 다시금 오늘 새벽기도회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죄악 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법의 행실이 난무한 세상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러한 죄악 된 일들을 보고 듣고 접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에게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셔서 우리는 예비하신 처소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셨는데 언제 오시는지 기대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3장12-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므로 숨질 때 되도록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또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고 이루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17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 할 찌어다.” 왜 시편 기자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2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2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11월을 감사 계절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물론 추수감사절인 Thanksgiving이 있는 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매달이 감사의 달이요 매일, 매 순간 감사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접할 때 감사하지 못할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접했을 때 그 힘듦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크고”란 히브리 원어로 “가발”로서 “많아짐”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이 의미가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사랑)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증대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사랑과 대조적입니까? 인간의 사랑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감소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더 증대하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증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월 지나갈수록 저와 여러분이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특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향하신 증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또한 느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39편 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생각은 그 수가 모래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한 영혼을 향한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가 이런 저런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하면서 마음에 눌리고 걱정, 염려 등으로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수 없이 많으신 생각들을 기억하므로 그 사랑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므로 찬양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많아지는)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서 멈추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 영혼, 영혼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점진적으로 더욱더 증대해져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한 영혼, 영혼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증대하지 아니하고 감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예배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자라면 우리는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증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빛을 점진적으로 들어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돼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실하심 때문입니다.
고 최진실 씨가 자살했을 때 이런 저런 뉴스들 가운데 “최진실”이란 이름 대신 “최가식”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쓴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가식”이란 무엇입니까? 인터넷 사전을 보니까 “말이나 행동을 마치 올바른 것처럼 꾸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을 “최진실”에서 “최가식”이란 식으로 여겼는지 또한 그러한 글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말과 비난 등을 괴로워하면서 견디지 못한 두 아이의 엄마의 자살 사건은 금년 한해 아마 연예계 소식 중에 top news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한 어르신 권사님의 권면을 잊지 못합니다. 저의 할머님과 함께 어느 노인 아파트에 갔었을 때 그 때 만나 뵈었던 나이 많으신 권사님 한 분이 저희 할머님의 부축을 받으시면서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할머님이 그 분에게 제가 목사가 될 것라고 말씀드리셨는데 그 말을 들은 그 어르신 권사님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시면서 ‘진실하십시오’라고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 분의 그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가끔 생각나면 얼마나 진실하지 못한 목회자가 많았으면 그 분께서 그렇게 저에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제 자신이 진실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도 느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7편에서 시편 기자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두 번째 이유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실하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영원하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못할찌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뤄 나아가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7편 1절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장 11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사(예를 들어 바울을 통하여) 그들 또한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두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나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중 하나는 히브리서 4장 9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진실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절). 우리는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즉, 우리는 믿음(faith)으로 신실한(faithful)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성가 “우리에게 향하신”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1절)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2x)
(2절)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 영원 영원하시도다(2x).”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크신 인자하심과 영원한 진실하심을 찬양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실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