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시편 113편 말씀]

 

 

찬양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인터넷 글을 보니까 찬양이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자가 진단법'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알고 싶다면 요즘 자신의 입에 자주 맴도는 노래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된다. 외롭다면 외로움에 관한 내용이 흐를 것이고 절망하고 있다면 비관적이고 슬픈 노래가 입에서 흐를 것이다.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찬양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곧바로 지금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시는 분은 없네' 와 같은 찬양을 하고 있다면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상태일 것이다. 우리의 입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입의 노래를 바꾸면 자신의 상태도 바뀐다는 사실이다. 만약 자신의 영적 상태를 바꾸길 원한다면 입술의 찬양을 바꾸면 된다. 하나님은 노래를 좋아하시기에 우리 입술의 찬양을 들으시고 그대로 역사하실 것이다”(인터넷). 입술의 찬양을 바꾸므로 우리의 영적 상태를 바꾼다는 말에 참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지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없이는 마음이 괴롭고 아픈 가운데서 찬송가 40장인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입술로는 억지로라도 부를 수 있겠지만 그 찬송을 하나님께 찬양하므로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찬양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 사도행전 16장에서 볼 수 있듯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미하였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상태만 변할 뿐 아니라 상황도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13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종들”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미천한 자리에 처하는 자들입니다(박윤선).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이 신앙으로 겸손하여져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려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박윤선). 우리는 미천한 자리에서 “이제부터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해야 합니다(2절). 즉, 시간적으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와 더불어 온 세계가 겸손히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3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미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까? 한 2가지 이유를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13편 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생각납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을 알기에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알아가는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합당한 찬양은 바로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고 드리는 찬양을 가리킵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늘 위에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 높으신 보좌 위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4-5절). 과연 우리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어떻게 알아가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고(특별 계시)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자연 계시)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제안은 성경 시편111편에서 우리가 이미 묵상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연구하며(2절) 묵상하며 기억하므로(4절)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묵상하며 즐거워하므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알아가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113편 6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낮아지셔서 모든 낮은 자들을 살피시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시편 말씀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33:13-15);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53:2). 이렇게 하나님께 스스로 낮추셔서 굽어 살피시는 자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그들은 “가난한 자를”, “궁핍한 자를”(113:7), 그리고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9절)들입니다. 즉,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시사 살피시는 사람들은 “빈천한 자들과 무가내하한 자들”(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가련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살피십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살피시며 이들을 “진토에서 일으키시며”(raises)(7절),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lifts)(7절)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십니다 (seats)(8절).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비천한 자들을 체휼하시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체휼”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할 때 성경 히브리서4장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롬8:26).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26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신 예수님을 묘사하는 빌립보서 2장6-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낮추시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낮추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이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숨질 때 되도록 주님을 찬양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