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마십시다.

 

 

[시편 103]

 

 

저는 오늘 새벽 기도회 때 성경 이사야 30장 18절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책임은 그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103편 2절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시편 기자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마십시다”란 제목 아래 한 5가지 하나님의 은택을 묵상하면서 기억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03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 최소한 양심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들춰지고 양심에 찔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죄책감에 너무 시달려 허덕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실망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존감도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하등 평가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균형 잃은 자아성찰 및 자아반성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는 것은 귀한 은혜지만, 그 깨달은 죄로 인하여 그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바라보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3편 10절과 12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를 따라 갚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노하시지만(8, 9절) 우리에게 급히 노하시어 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8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하나님의 징벌이 속히 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롬2:4).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즉각 징벌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기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노하시되 그것을 오래 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3:9).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시고(11절)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8절). 그러므로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과를 따라 갚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에게 멀리 옳기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죄과를 너무 가까이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과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뻐하셔서 철저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데 우리는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게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철저히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깨달아야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시편 86편 5절을 보면 “주는 선하사 사유하시기를 즐기시며 …”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성건 목사님은 그의 책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의 긍휼은 여지없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극심한 상황에 처해있어도, 죄악의 악순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용서하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즐겨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인자하게 행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03:14). 즉, 그는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14절). 오늘 본문 시편 103편 15-16절을 보십시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풀과 같은 인생, 들의 꽃과 같은 인생, 바람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인생, 참으로 연약한 인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체질을 아시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13절). 그러시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즐겨 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시기를 너무나 즐겨 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03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요즘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생로병사”란 말처럼 사람은 태어나서 늙다가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드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병이 들 때 하나님께 우리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구하곤 합니다. 어느 누가 병 가운데 고통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15장 26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시편 147편 3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치시되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 후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근본적인 문제란 다름 아니 죄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예: 욥) 우리가 육신적으로 병이 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성경 역대하 21장 18-19절에 나오는 여호람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여 회개치 아니하고 있을 때 그 회개치 아니 한 죄의 결과로 질병과 또한 그에 따른 상처와 고통 속에서 거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 한 예는 마태복음9장1-8절에 나와 있는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죄를 먼저 사하여주신 후[(2절하) “…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6-7절) “…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모든 병을 고시십니까?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성경 시편 107편 20절을 보십시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8장8절을 보면 우리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길 부탁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절). 우리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만 해결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육신의 병도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03편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 여기서 “파멸”(pit)이란 단어를 보면 생각나는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바로 요나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인 ‘일어나 가라 그리고 외치라’는 말씀(욘1:2)에 불순종하므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되 바다 깊인 곳, 즉 ‘구덩이’(pit)(2:6)까지 내려갔습니다. 욥바로 내려갔고(1:3), 배에 내려갔고(3절), 배 밑층으로 내려갔으며(5절) 더 나아가서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습니다(2:6). 요나는 불순종하므로 결국 ‘구덩이’(the pit)까지 내려갔습니다(6절). 그러나 요나는 그 깊은 구덩이(파멸) 속에서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사 그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6절). 이 요나를 생각할 때 우리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요나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구덩이와 같은 지옥과 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신바 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파멸의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속해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 엘리후가 욥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욥33:3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지옥과 같은 구덩이(파멸)에서 끌어 돌이키신 목적은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비춰 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속해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은택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03편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 볼 정도로 받은 풍성한 은혜를 의미합니다(박윤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혜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시험하시사 우리를 단련시키신 후에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시편66편10, 12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 셨나이다.” 풍성한 은혜를 받기 위해선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돼야 합니다. 그러한 풍성한 은혜를 담글 수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선 우리에게 단련이 필요합니다. 그 단련을 통하여 우리는 마음과 입을 크게 열고 하나님께서 하늘에 쌓아 놓으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겸손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 가운데서 누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5장20절을 보십시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죄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죄를 아는 자들이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주시는 그 풍성한 은혜에 거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누리면 살아가는 신앙인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시편 103편 20-21절을 보십시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누리며 살아가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20절). 하나님을 봉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21절).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의 은택은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103편 5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성도에게 영적 은혜를 풍부히 내려 주사 그 심령으로 즐겁게 하고 힘 있게 하시므로 속히 노쇠해지지 않게 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 중 하나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네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계3:15). 왜 우리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가리켜 ‘미지근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17절).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간절히 필요한 목마르고 굶주린 영혼이 없는 자아 착각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 “부자”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난한 심령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구하지 않는 영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지 않는 영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 사모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시편 기자는 성경 시편 107편4-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그러한 굶주리고 목마른 상황에서 그는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6절).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도 응답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9절).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시편 기자는 이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찌로다”(8절).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5절). 여기서 왜 다윗은 그의 청춘을 “독수리”에 비교했습니까? “’독수리’는 노쇠하므로 죽는 것이 아니고, 너무 오래 삶으로, 그 부리가 너무 길어져서 잘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먹지 못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독수리는 불로의 상징입니다. 성도는 그 신앙의 힘 때문에 육신도 장수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성경 이사야 40장 29-31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 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 치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 다윗처럼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1-2, 22).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택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새벽 기도회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