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빈궁한 자의 기도

 

 

[시편 102]

 

 

지난 주일 1구역 성경공부 때 “영적 전쟁” 3과 “내면의 유혹에 직면할 때”를 공부하는 중 한 분이 마태복음5장3절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을 나누시면서 우리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교훈을 나누셨습니다. 내면의 유혹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그 유혹(들)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저회 히스패닉 사역 목사님이신 고메즈 목사님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선교지에서 있을 수 있는 지도자의 내면의 유혹에 대해서 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내면의 유혹이란 교만과 욕심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우리 내면을 한번 바라보십시다. 어떠한 것들로 차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아니면 미움과 시기로? 겸손으로 교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고 있습니까? 등등… 저는 오늘 본문 시편102편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영적 궁핍함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좀 굶주려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 마음을 채우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102편 17절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빈궁한 자의 기도”란 제목 아래 한 2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빈궁한 자”란 누구이며 둘째로, “빈궁한 자”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빈궁한 자란 누구입니까?

 

빈궁한 자란 “고난을 당한 성도”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우리가 이미 묵상한 시편 41편을 보면 “빈약한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1절). 거기서 빈약한 자란 “빈핍한 자(출30:15), 병약자(창41:19), 마음이 약한 자(삼하13:4)”등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빈약한 자”란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모든 고난당한 자를 가리킵니다(칼빈).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고난당하는 자를 “빈약한 자”, 영어로는 “the helpless”(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자, 무력한 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히브리 단어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면 “poor”(가난한) 또는 “weak”(연약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운데 낮아진 상황, 즉 낮은 지위 가운데 억압 받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14절에서 이러한 빈약한 자를 어떻게 묘사했는가 하면 “마음이 약한 자들”(the timid) 그리고 “힘이 없는 자들”(the weak)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빈약한 자”가 오늘 본문 시편102편 17절에 나오는 “빈궁한 자”와 비슷합니다. 즉, 빈약한 자나 빈궁한 자는 다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고난당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 빈궁한 자인 시편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과연 어떠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이 빈궁한 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까? 이 시편은 누가 지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 저자는 바벨론 포로 중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갈망하며 이 시편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즉, 시편 기자가 말하는 빈궁한 자의 고난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서 당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빈궁한 자는 몸도 쇠잔해 갔었고(3절) 또한 마음도 풀같이 쇠잔하여졌습니다(4절). 또한 빈궁한 자는 심히 고독한 처지에 있었습니다(6-9절). 6절에 나오는 “당아새”와 “부엉이”는 고독을 상징합니다. 즉, 성도는 고독을 종종 당합니다(7절)(박윤선). 이러한 고독과 근심이 심한 틈을 타서 원수들은 빈궁한 자인 시편 기자는 덮쳤습니다. 이것은 설상가상 격의 고난입니다(박윤선). 이러한 고난 중에 있었던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오늘 본문 1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빈궁한 자가 아닙니까?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고난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고난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다 쇠잔하여졌고 고독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가운데서 설상가상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더 고통을 당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러한 고통을 여러분이 당하고 있다면 이것은 기도하기 좋은 기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빈궁한 자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빈궁한 자의 기도는 어떠하였습니까?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빈궁한 자의 기도 자세입니다.

 

빈궁한 자의 기도 자세는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의 확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하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소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념”입니다.

(a) 이 신념의 원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에 근거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2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줄을 알게 되는 때에는, 만사가 해결될 것을 확신함에 이릅니다(박윤선). 그 살아계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시 하신 진리의 말씀대로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주신다(“주의 기념 명칭”)는 확신이 시편 기자에게 있었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b) 이 신념의 원인은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이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3).

 

즉, 빈궁한 자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시온”)을 긍휼이 여기실 것을 알고 있었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정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안 이유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전에는 귀한 줄 모르던 “시온” 곧, 교회를 이제 애모하여 그곳의 돌과 티끌까지 동경함을 그가 본 까닭입니다(14절)(박윤선).

 

우리에게도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에 또한 그의 교회를 긍휼이 여기시기에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가 우리를 건져줄 것을 우리는 믿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시온” 즉 그의 교회를 건설하시고 그 영광중에 나타나시고 또한 나타나실 것이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하감하시사(19절)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므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20절).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케 하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1절).

 

(2)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빈궁한 자의 기도 내용입니다.

 

(a) 빈궁한 자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은 자기의 삶을 연장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2편 23-24절을 보십시오: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년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시편 기자가 말한 비참한 고난의 상황이란 시편 기자는 육신이나 마음이나 여러모로 쇠잔한 가운데 있었기에 빈궁한 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쇠약한 심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일찍 죽음을 면케 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3-11절, 박윤선).

 

(b) 빈궁한 자의 두 번째 기도 내용은 주님의 자손이 항상 있고 주님 앞에 굳게 서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2편 28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빈궁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쇠약한 심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일찍 죽음을 면케 해 주시길 간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가 사랑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이 빈궁한 자인 시편 기자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신 예수님(막14:33), 마음이 심히 고민하신 예수님 (34절),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줄 알고 계셨던 예수님(27절), 그의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36절). 그분께서는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시면서 그의 부르짖음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습니다(15:34).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받으신 예수님,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천국 백성들로서 이 광야의 여정에 예수님처럼 빈궁한 자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영원하신 하나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빈궁한 기도 자가 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수요기도회 때 찬송가 360장을 부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