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시편 88]

 

 

이번 주 월요일 (2월25일) 고 정상우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정명선 사모님이 누워계셨던 병원에 갔었습니다. 맏아드님과 맏며느리가 있길래 잠깐 사모님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수 있냐고 물은 후 사모님의 이마에 제 손을 얹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잘 해 아리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사모님의 의식을 되찾아 주셔서 자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였습니다. 흐느끼는 아드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후 저는 병원에서 나와 저희 박 권사님이 계시는 양로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날 25일이 제가 알기론 박 권사님의 90세 생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찾아뵈었을 때 눈을 뜨시고 조용히 누워계시는 권사님을 바라보면서 인사하고 저 혼자 잠깐 이런 저런 말 한 후 권사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생신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 드렸습니다. 그런 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찬송가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찬양하였습니다. 왠지 그 찬송을 부르면 권사님께서 눈을 서서히 감으시고 잠이 드시곤 하십니다. 그래서 잠드시는 모습 보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저녁에 집에 있는데 형수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우시면서 ‘기도를 해주고 계시는 줄 알지만 저희 어머님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셔서 그저 전화로나마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아프실까 생각해 볼 때 저는 다시금 55일 만에 제 품에서 잠든 첫째 아기 주영이 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호흡기 등 모든 것을 다 빼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주영이 때 제 마음이 어떡했는지를 생각하면서 형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 사모님께서는 오늘 새벽에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젠 더 이상 그분의 오른쪽 눈가에 흐르던 눈물을 보지 않아도 되는 영원한 저 세상,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죽을 일이 쌓인 세상입니다. 참으로 찬송가 474장 가사처럼 이 세상은 근심된 일, 곤고한 일 그리고 죄악 된 일이 많은 세상임을 더욱더 피부 적으로 느낍니다. 과연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성경 시편 88편은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시편 88편 2절 하반절에 적혀있는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란 말씀 그래도 제목을 삼고 한 두 가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왜 시편 기자는 주님께 부르짖었는가?’이며 ‘둘째는, 시편 기자가 간절히 찾았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오늘 본문 중심으로 답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기도자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왜 시편 기자는 주님께 부르짖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시편 기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을 한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시편 기자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는 곤란이 가득하였었습니다.

 

성경 시편 88편 3절, 9절과 15절을 보십시오: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3절),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9절), 그리고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이유는 그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곤란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곤란을 “우울과 고통”이였습니다(박윤선). “고통”이란 “고통스러운 질병”[표제에 나와 있는 “마할랏르인놋”라는 말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울”이란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인한 우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 이유 중 하나는 시편 기자는 젊었을 때부터 곤란을 당하여서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많이 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15절). 그리고 그러한 곤란 중에서 시편 기자는 기도를 매일 주님께 드린 결과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9절)(박윤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찬송가 474장 2절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 질병과 고통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109:4). 우리는 곤란이 가득할 때 그저 하나님께 기도드릴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곤란이 점점 더 가득해져 갈 때에 시편 기자처럼 더욱더 그리고 매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둘째로, 시편 기자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는 극도로 외로웠습니다.

 

왜 시편 기자는 극도로 외로웠었습니까? 한 2가지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하나님께 버리심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88편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우리가 매주 수요일마다 시편 말씀을 묵상해오면서 종종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특히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극도로 외로움을 느낀 것입니다. 이러한 극도로 외로움 가운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2) 주님께서 시편 기자가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그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8절과 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8절),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 암에 두셨나이다”(18절). 시편 기자는 주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과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도로 외로움을 느낄 수가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상황에 지금 놓여 있던지 또는 앞으로 놓이게 된다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외로움을 세상으로부터 떠나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로, 시편 기자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습니다.

 

성경 시편 88편 3절 하반절, 4절, 5절, 6절, 10절, 그리고 15절을 보십시오: “...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3절하),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4절), “사망자 중에 던 지운바 되었으며 살육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치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5절),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6절),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10절), 그리고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15절). 실제적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분들을 접하면서 제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험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피부 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저 뿐만 아니라 병중에 계셨던 그 분들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시편 기자도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4절). 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힘이 없는 사람과 같다고 고백하였을까 생각해 볼 때에 그 답을 오늘 본문 5절에서 찾게 됩니다. 즉, 그는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치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을 때 주님께서(도) 나를 더 이상 기억치 아니하시고 또한 우리를 더 이상 돌보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에 더욱더 힘이 없게 되고 낙망하며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자로 세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생사의 갈림길에 앞으로 놓여 있을 때에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간절한 기도처럼 우리 또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시편 기자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그는 주님의 진노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경 시편 88편 7절과 16절을 보십시오: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7절),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16절). 주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 저는 지난 주 사랑하는 막내 딸 예은이를 징계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예은이를 징계한 이유는 잘못인 줄 알면서 유치원에서 친구들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우는 사랑하는 딸의 눈물과 콧물을 보면서도 매로 징계를 하였습니다. 매우 두려워하는 예은이, 엉엉 우는 예은이를 보면서도 매를 들고 그 아이를 징계하였습니다. 물론 주님의 진노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왠지 주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괴로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어제 화요일 저녁에 어떻게 예은이랑 대화하다가 예은이가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고 또 한 남자 아이를 때렸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예은이는 지난주처럼 자기가 알고 스스로 침대에 서서 차렷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두려워하는 얼굴이였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앉으라고 말한 후 대화를 하였습니다. 왜 때렸냐고 하니까 자기를 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때렸냐고 물으니까 등을 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맞은 아이의 반응을 물어보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예은이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남을 때리는 것을 잘못이라고 가르친 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는 하나님께 “I am so sorry …”(미안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기도 후 아이를 포옹하고 아빠가 예은이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을 때 그의 징계로 말미암아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죄로 인하여 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가 곤란한 가운데 있게 되고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생사의 갈림길에까지 놓여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으로 믿고 기도에 전혀 힘쓰십시다.

 

마지막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간절히 찾았던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떠한 하나님에게 간절히 부르짖었습니까? 2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편 기자가 간절히 찾았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이였습니다.

 

성경 시편 88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여기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이란 표현은 하나님에게 대한 이런 칭호는,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을 여러 차례 체험한 자의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박윤선). 시편 기자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위기 가운데서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였기에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시편 기자가 간절히 찾았던 하나님은 바로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주님 이였습니다.

 

성경 시편 88편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오직”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 외에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가 구원해 주실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주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귀를 우리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2절).

 

그 하나님께 오늘 밤 우리 함께 기도드리십시다. 어떠한 상황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처해 있을지라도 그 상황을 기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오늘 이 밤에 함께 기도드리십시다.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께 간구 한 후,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