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자손에게 알게 하라

 

 

[시편 781-22]

 

 

“유대인 3차원 영재교육의 비밀: 마음은 비둘기, 머리는 뱀 같은 아이로 키워라”라는 기사를 보면 우리가 경쟁사회에서 승리하려면 마음(EQ)은 착하고 머리(IQ)는 똑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12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이것을 유대인들은 “마음(EQ)은 순결하지만 머리(IQ)는 세상 지혜를 능가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자녀가 세 살이 되면 어려운 율법을 줄기차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법을 배우면 사람이 매사에 까다로워져서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1등 민족이 된 비밀입니다. 이 기사를 쓴 저자는 “유대인의 교육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한국인도 유대인 못지않게 자녀 교육에 집착하는데 왜 우수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지 않는가”라는 궁금증을 갖고 유대인의 자녀 교육법에 주목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들의 영재 교육 3차 단계를 보면 “제1차원 영재교육: 지식 위주의 지능개발, 일반 학교 교육에서 실시하는 IQ교육 포함; 제2차원 영재교육: 슈르드(shrewd), 영리함, 현명함을 개발; 제3차원 영재교육: 지혜(wisdom) 개발”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의 영재교육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정리하면 지식, 슈르드, 지혜의 순서가 됩니다. 교육의 목표는 당연히 3차원의 지혜 단계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나 한국의 현실은 늘 1차원 단계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대인의 영재교육은 가장 높은 3차원 지혜를 가르치고 다음 슈르드 교육을 시키고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칩니다. 즉 인성교육을 성경으로 하는 과정에서 지혜와 슈르드를 개발한다는 것입니다(인터넷).

 

흥미로운 유대인의 3차원 영재 교육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녀 영재교육에 있어서 제1차원 영재교육인 지식 위주의 지능개발을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먼저 제3차원 영재교육인 지혜 개발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종교생활을 통해 지혜교육을 받고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혜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며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지혜는 구약의 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와 같은 일종의 유대문학과 탈무드, 율법 등에 집약돼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내용과 형식을 삶 속에 구조화(structurization)해서 지혜가 그들의 독특한 수직문화에 넓고 깊게 스며들도록 합니다. 여기서 수직문화란 인간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이루는 역사, 철학, 사상, 전통, 고전 및 종교에 의한 문화입니다. 이에 비해 수평문화는 인간의 외면적 형이하학의 물질, 권력, 명예, 유행 및 현대 학문과 현대 과학 등을 말합니다. 수직문화가 변하지 않는 영혼을 위한 가치라면, 수평문화는 항상 변하는 육(肉)을 위한 것입니다. 수직문화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깊이 있는 문화라면, 수평 문화는 인생의 재미를 찾는 표면문화입니다. 수직문화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굳건히 하여 내면적 자신감을 키우는 그릇으로 만듭니다. 수직문화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라면 현대 학문이나 과학은 소프트웨어라 하겠습니다. 지혜가 커야 지식도 그 안에서 제대로 쓰여집니다(인터넷).

 

오늘 성경 시편 78편 4-5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후대에 전하리로다”고 결심하면서(4절)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5절). 그래서 저는 오늘 “자손에게 알게 하라”는 제목 아래 과연 저와 여러분이 우리 자손에게 무엇을 알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우리 자손에게 알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성경 시편 78편 4절과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4절), “…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7절). 시편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게 하였던 하나님의 행사는 “홍해를 건넌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야에 나타난 모든 일들”이였습니다(12-22절) (박윤선). 오늘 본문 12절부터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애굽 땅에서 “기이한 일”(wonders)들을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조 앞에서 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이한 일”들이란 무엇입니까? 그 일이란 홍해 바다를 갈라 물로 하여금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신 일(13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신 일(14절),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사 물을 내시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물을 흡족히 마시우게 하신 일(15-16, 20절), 그리고 광야에서 하늘 문을 여시사 하늘 양식인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신 일(23절ff) 등등 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그 대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이한 일들을 많이 행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행하신 기사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사들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과거의 삶 속에 행하신 일들, 베풀어 주신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결심하고 실행으로 옮겼던 것처럼(77:11) 우리도 하나님의 “옛적 기사”, 그가 우리 삶 속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으로 옮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우리 자손에게 알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성경 시편 78편 5절과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5절),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7절).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도”를 정하시고 명하사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손들은 또 그들의 자손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7절)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법도”는 좁게 해석하면 이스라엘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가리키고 좀 더 넓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법도”란 단어 외에도 오늘 본문 5절 상반 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증거”라는 단어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사실을 대대로 증거하는 의미에서 증거입니다(박윤선). 그 자기 계시 중에 하나는 성경 신명기 6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그러나 문제는 오늘 본문 시편 78편 10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이 말씀의 배경은 에브라임 자손들이 본래 싸움을 잘하는데도 (창49:24)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 때에 패배한 것(삿1:29)을 가리켜 한 말씀입니다(박윤선). 이 에브라임 자손들의 패배 원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한 불순종과 불신앙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열조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의 죄악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 자를 배반”한 죄(시78:17),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 가운데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한 죄’(18절),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죄(19-20절).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습니다(19-20절). 한분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조들과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신6:6-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하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 자손에게 알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78편 7절을 보십시오: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자기 시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박윤선). 그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열조처럼 하나님의 기사를 망각하고 그의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죄를 범하지 말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생각하면 시편 기자의 결론은 불신앙이 아닌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의 결론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 합니다.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박윤선).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4).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의뢰의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주님께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저의 삼촌인 고 김창혁 목사님이 암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이야기입니다. 월요일 오전에 찾아뵈었을 때 목사님과 이런 저런 대화하면서 좀 많이 웃었습니다. 그 대화중에 물론 사모님과 목사님의 두 자녀들의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그 대화중에 특히 목사님은 두 아드님의 자녀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맏아들이 아들을 낳으면 “승겸”, 딸을 나면 “예손”을 생각하시더군요. 둘째 아들의 경우는 앞으로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아들은 “승예”인가 그렇고 딸을 낳으면 “예방”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왜 목사님께서 후손들의 이름들을 이렇게 지으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첫째로는 “겸손”이요 둘째로는 “예방”(방지)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교만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맏아들이 자녀를 낳으면 “겸손”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으신 것 같고 둘째 아들의 자녀들 이름은 “예방”을(방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자녀들과 후손들을 생각하여 지은 이름들을 생각할 때 저는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자요 또한 예방하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는 겸손히 하나님이 자기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역사(기인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는 결코 소망을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그는 주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하나님의 계명과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입술로 또한 삶으로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알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신 딜런, 예리, 예은이를 생각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계명 그리고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을 가르치는데 헌신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