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편: 나의 연약함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시편 77편 10절).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세월 지나가면 갈수록 더욱더 깨닫게 됩니다. 특히 역경과 고난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피부 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특히 그 역경과 고난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고 큰 역경과 고난일수록 그 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 시편 77편10절에서 시편 기자 아삽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은 한 4가지로 표출하였습니다(1-9절).
첫째로, 아삽은 불안하여 근심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77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 이 세상엔 참으로 곤고한 일과 근심된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찬송가474장). 또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시43:2). 오늘 본문에서 아삽은 “나의 환난 날”에 주님을 찾았지만(시77:2)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어서였는지 그는 불안하여 근심했습니다. 불안해하는 마음과 근심에 쌓인 마음은 참으로 연약한 마음입니다.
둘째로, 아삽은 심령이 상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77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아삽은 환난 날에 불안과 근심 속에서 결국 심령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또한 너무나 괴로워 말할 수 없었습니다(4절). 우리 사람은 너무나 괴로우면 잠도 잘 수가 없고 또한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목회하면서 힘들었을 때 한 3주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적이 기억이 납니다. 음식이 앞에 있어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도 경험한 기억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나 요즘 마음이 괴로워’라고 말한다면 아직도 그렇게 괴로운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떠한 괴로움은 진정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한 괴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듭니다. 사람들 앞에서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까지 침묵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상한 심령은 연약한 심령입니다.
셋째로, 아삽은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77편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아삽은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괴로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불안과 근심 속에서 잠 못 이루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 가운데 있었던 아삽은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그의 심령은 상해 있었습니다. 욥기 생각납니다.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있었던 욥, 그를 위로 하고자 찾아온 친구들, 그러나 욥은 그들을 가리켜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말하였습니다(욥16:2). 사람이 너무나 괴롭고 극심한 고통 중에 있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가 우리 삶 속에서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나를 위로해 주실 수 있다고 믿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연약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아삽은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성경 시편 77편 7-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아삽은 환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아무 응답이 없으므로 그의 마음과 심령은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연약함 가운데서 아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아삽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불 확신은 마음이 연약해져 있음을 알려줍니다. 연약해 진 마음은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한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고 또 다른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결국 불안과 근심, 상한 심령과 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마음에는 불신이 싹을 틀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연약해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옛적 기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77편 11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 너무 힘들고 마음이 괴로울 때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되새겨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과거 제 품에서 죽은 첫째 아기 주영이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때만큼 저에게 고통스러웠던 적이 아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마음에 고통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만 우리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념합니다. 현재의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그 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할 때 연약해졌던 제 마음과 심령이 다시금 소성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금 힘을 얻게 됩니다. 기억하고 기념할 때 저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진술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77편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우리는 과거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진술해야 합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저보고 왜 아직까지 첫째 아기 주영이에 대해서 말을 하냐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끔 주영이 이야기를 설교 시간에도 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주영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영”이름 그대로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그 주님을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면 저나 제 아내는 이겨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영이 때 저희 부부 삶 속에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나누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나눌 때에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주님의 모든 일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77편 12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아삽은 환난 날에 연약함 가운데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면서 과거뿐만 아니라 더 포괄적으로 현재 환난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였습니다. 실제로 연약한 가운데서 우리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못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현재에도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게 되면서 그 믿음으로 주님의 행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까지도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였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깊은 묵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묵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행사)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연약해 지는 우리의 육신, 불안과 걱정 속에서 허덕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잠 못 이루는 밤도 늘어가고 또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시달리기도 합니다. 상한 심령,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할 때 의심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옛적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행하신 일을 묵상하면서 또한 진술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해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제임스 목사 나눔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더욱더 철저히 깨닫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