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

 

 

[시편 76]

 

 

계시(revelation)란 무엇입니까? 계시란 “숨겨져 있는 것을 (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나타내 보여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됩니다. 하나님께 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고 말했습니다. 계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와 “특별계시 (special revelation)”가 있습니다. 일반계시란 자연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 적으로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원리를 반영합니다. 특별계시란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 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합니다. 특별계시는 자연계시보다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자연계시를 보완해 주고 혹은 강조적으로 반복하며 바르게 해석해 주기도 합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특별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필수적으로 요청됩니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의 원리에 의해서는 죄인에게 오로지 심판과 멸망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오늘 새벽기도회 때 읽은 말씀 중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른 복음”(6절)을 좇는 그들에게 자기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7절)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절). 다시 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12절).

 

우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 시편 76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크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적은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오늘 그 계시된 하나님을 한 4가지로 묵상하는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76편 7절을 보십시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 곧 주님의 원수들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원수들의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십니다(3절). 다시 말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멸망시키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6절). 폭풍을 꾸짖으시매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심판한 날을 정하시사 예수님을 재판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가 악인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진노하시사 악인을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노를 금하신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10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노를 당신의 허리에 띠신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 사람의 노(wrath)를 허리에 띠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분노 또한 사용하시사 그의 영광을 들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 사람의 분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의 분노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의 분노를 허락하시사 사용하셔서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의 멸망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드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분노도 사용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쏟아내시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악인을 멸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0절). 악인의 분노까지도 사용하시사 자신의 진노를 악인에게 쏟으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노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외할 자”이십니다(7절).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경외할 이”(One to be feare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절). 그분은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신 하나님이십니다(12절). 우리가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은 꾸짖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시편39편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노가운데 우리를 꾸짖으심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38:1).

 

둘째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76편 9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8절) 악인들에게 진노를 쏟으시사 그들을 멸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구원하시되 온유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겸손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온유한 자’란 말은, 환난과 핍박 아래서 마음을 낮추며 겸손해져서 하나님만 의뢰하게 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렇게 마음을 낮추며 겸손해져서 하나님만 의뢰하게 된 겸손한 신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어떠한 자들로 묘사하고 있는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1절). 하나님을 알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겸손한 자들은 주님의 처소에 거하는 자들입니다(2절).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자들 또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3)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7절). 그리고 (4) 겸손한 자들은 주님을 찬송하는 자들입니다(10절). 하나님은 이러한 겸손한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하시되 겸손한 자들을 대적하며 핍박하는 교만한 자들, 즉 “마음이 강한 자”들(5절)을 물리치시고 멸망시키시므로 하나님은 겸손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75편).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바로 ‘구원’입니다. 겸손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에 대해 죤 칼빈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무죄하게 압제를 당하는 자를 내버려 두시기가 불가능하니,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시기가 불능함과 같다”(칼빈).

 

셋째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존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76편 4절을 보십시오: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여기서 “영화로움”이란 히브리 원어 의미는 “빛으로 두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위력의 현현을 상징합니다(단2:22; 딤전6:16)(박윤선). 이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약탈을 일삼는 열방들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얻으시므로 그의 택한 백성들 앞에서 존귀롭게 나타나십니다(박윤선). 이 승리하시는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강한 자”들이나 “장사”(the warriors)들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5절).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 존귀하신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11절). 약탈을 일삼는 이방 나라를 물리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기자는 사방에 있는 모든 이웃들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존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서원한 것을 갚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 정성 것 우리의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죄인들에게 쏟으셔야 할 진노를 독생자 예수님에게 쏟으시사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76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에게 진노를 쏟으시므로 멸하시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므로 그의 영광과 존귀를 들어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시편 기자는 “그 이름은 이스라엘 크시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1절).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사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신7:6-8) 출애굽 시대 때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시사 그의 영광을 들어내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나라(앗수르)를 멸하시사 그의 크신 이름을 온 세상에 들어내셨습니다. 가장 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크신 하나님께서 큰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시사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가장 적은 또는 지극히 작은 저와 여러분들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므로 때에 따라 돕는 은혜로 구원(건져)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10절).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7, 11, 12절). 셋째로,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9절). 넷째로, 주님께 몸과 마음과 정성, 헌신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11절).

 

오늘 양로원을 향해서 가는 중에 예은이가 교회 할머님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할머님 한 분만 보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라고 물었더니 예은이의 하는 말 ‘다른 할머님은 아무 말도 못하시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시니까 말을 할 줄 아는 할머님만 보로 가자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은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말 못하시는 할머님이 슬퍼하실 꺼야. 그리고 비록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머님과 만나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 … 그리고 제가 확신하는 것은 박 권사님은 치매로 아무 기억이 없으셔도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잘 모를지라도 저는 고린도전서 8장 3절 말씀을 붙잡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그리고 우리가 가진 소망은 “… 이제는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입니다(13:12). 이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을 알므로 나를 알고 나를 알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길 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