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

 

 

[시편 69]

 

 

지난주일 오전에 목양 실에 있는데 저희 집 막내 예은이가 제 앞 의자에 앉아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저에게 고개를 돌려 “Do you know I feel?”(내 기분이 어떤지 압니까?)라고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딸 예은이의 느낌을 끌어내고 공감하고자 ‘잘 모르겠는데 지금  너의 기분이 어떻한데?’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은이가 하는 말, “Happy”(기쁘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기쁘냐?’(Why?)고 물었습니다.  물론 이 질문을 예은이에게 던졌을 때에는 저에게 기대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 13일 동안 집을 떠나 한국과 몽골에 갔다가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기쁘다’라고 할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딸 예은이게서 뜻 밖에 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한마디는 다름 아닌 ‘a perm’(파마)였습니다. 좋았다가 말았습니다 ㅎㅎㅎ.  한국과 몽골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토요일 오후 공항에 아내와 마중 나왔던 예은이는 그 날 파마를 했었는데 주일 아침 교회 오니까 고모나 할머님 등 사람들이 다 예은이의 파마한 것을 보고 칭찬해서인지 예은이가 그날 오전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대답을 듣고 속으로 많이 웃으면서도 그래도 사랑하는 딸이 기쁘다고 하니 저 또한 기뻤습니다.

 

우리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기뻐하면 우리 또한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이 기쁘면 자신들도 기쁜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  대학교 때 한 후배가 성적표가 잘 나오지 않아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 후배에게 ‘공부하는 것을 즐기라(enjoy)’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배가 하는 말, ‘우리 부모님에게 그 말을 해 보라’는 식의 답변이였습니다.  그 후배는 공부해서 성적표를 잘 받아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모습은 엿보였지만 왠지 그것이 자신의 기쁨인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여기서 배우고자 하는 영적 교훈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기쁨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 대학 후배처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며 기쁨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우리의 행함(action)보다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의 자녀가 돼야 하는지 우리의 존재(being)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69편 31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다윗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는 것이였습니다(30절).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제목아래 어떠한 자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지 한 네 가지로 묵상하며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는 주님을 찾는 자입니다.

 

성경 시편 69편 6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여기서 ‘주님을 찾는 자’와 ‘주님을 바라는 자’란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을 바라는 자, 즉 주님께 소망을 둔 자는 주님을 찾습니다.  왜 다윗은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를 간절히 찾았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2절).  다윗이 깊은 수렁에 빠진 이유는 바로 그를 무고히 미워하는 자가 그의 머리털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4절).  다시 말하면, 다윗이 깊은 수렁에 빠진 이유는 그를 무고히 미워하는 강한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을 끊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깊은 수렁에 빠진 또 다른 이유는 오늘 본문 8절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그가 극심한 곤고한 처지에 빠져있을 때에 그를 더 괴롭게 하였던 것은 그의 형제들조차 다윗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외로웠습니다.  다윗은 “긍휼히 여길 자”와 “안위할 자”를 바라고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20절).  우리도 다윗처럼 억울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를 긍휼이 여기고 위로할 자를 찾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쩔 때 우리를 긍휼이 여기고 위로할 자를 허락지 않으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욥처럼 우리를 위로하러 오는 친구들조차 우리를 번뇌케 하는 안위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욥16:2).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시는 주님만을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서 형제들에게도 외면을 당하여 긍휼이 여기는 자나 안위 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시69:13).  다시 말하면, 다윗은 깊은 수렁에 빠져있었을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의 최종적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였습니다(1절).  그 구원의 기도를 드리되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3절).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므로 말미암아 피곤하여 목이 마르고 하나님을 바람으로 눈이 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며 간구하는 가운데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5절).  다윗은 비록 지금 그의 원수들에게 까닭 없이 고난을 받고 있는 중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기 자신이 무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고난은 그에게 유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자복한 후 하나님의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를 구하였습니다(13절). 이 기도는 시편57편 3절에도 나와있습니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시고 진실하신 구원 행위를 인격화하여 말하는 시적 표현입니다(박윤선).  그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강한 원수들이 자기 머리털보다 많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다윗처럼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시기입니다.  그 때 우리는 실망할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날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중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간절히 바래야 합니다(16, 17절).

 

둘째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는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 시편 69편 32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여기서 “온유한 자”란 히브리 원어로 “아나윔”으로 그 의미는 “고난 받는 자들”이란 뜻입니다(박윤선).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자들은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자들입니다.  겸손해지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 지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기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10절).  이것은 오직 영적으로 고요히 자기 자신을 ‘경계’하며, 낮추며, 기도하는 것으로”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은 것입니다(박윤선).  즉, 영적 비애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외부적 표현입니다.  이러한 온유한 자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실 구원에 대한 신념 또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말미암아(29-30절) 온유한 자들의 마음이 소생케 되는 것입니다(32절, 참고: 시138:7).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환난 중에 있을지라도 겸손히 주님께 간구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소성케 하시는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는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10:17).

 

      온유한 자,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자,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더 겸손해지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해 응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로 내게 배우라 …”(마11:29).

 

셋째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는 궁핍한 자입니다.

 

성경 시편 69편 3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다윗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난하고 슬픈 자라고 하였습니다(29절).  이것은, 다윗이 외부적으로만 비참한 자리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특히 그의 심령이 낮아져서 주님만 의지하게 된 사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는 큰 고난으로 인하여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므로 말미암아 그의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18절).  큰 고난을 통하여 심령이 가난해 진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하시길 간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기 때문입니다(73:28).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가난한 상태에서 견디어 가는 자로서 이 영적 수난자는 (1) 첫째로, 자기의 할 수 없는 처지와 하나님 밖에 도와 줄 자가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의 박해를 받는 자들입니다.  (3) 셋째로, 죄를 인하여 상심하며 회개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영적 수난자가 복이 있음은 천국이 저희 것, 즉 하나님의 영적 통치를 받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궁핍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궁핍한 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기의 “긍휼이 여기는 자”와 “안위할 자”로 삼습니다(시69:20).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적 통치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축복을 누립니다.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성경 시편 69편 36절을 보십시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30절).  그리고 그들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합니다(30절).  다윗은 자기 당면한 고난과 위험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줄 확신하였기에 그 구원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여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34-3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신 후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시는 자들은 그 곳에 영원히 거하게 하십니다.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은 세상에서 더렵혀지는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겔36: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우리가 세상 사람들 중에서 더럽힌 하나님의 큰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하십니다(23절).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큰 이름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과연 어떠한 자들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합니까?  바로 주님을 찾는 자들, 온유한 자들, 궁핍한 자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자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1.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후렴}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1.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주님의 기쁨이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행함보다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