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편: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1)
[시편 68편 19-35절]
지금 미국 헌팅톤, 유타 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광산 1,500 feet에 밑에 갇혀 있는 6명의 광부를 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10명 중 4명은 피해서 살아 나왔지만 남은 6명의 생사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을지 모르는 이 광부들을 살리려고 구출(rescue) 미션이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 6명의 광부들을 만일 살아 있다면 지금 외부에서 구출 미션이 잘 되서 그들을 그 깊은 곳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그 곳에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가 하루 속히 자기들을 구원해 주길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가 생각납니다. 성경 요나서 2장에 가서 보면 큰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 바다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생각납니다. 그러한 극심한 위기의 상황에서 한 요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욘2:9).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철저히 깨달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많이 느낍니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변화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서 저는 저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68편 35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그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한 가지만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19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 다윗이 말하고 있는 “우리 짐”(our burden)이란 무엇입니까? 한 4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 짐이란 “원수”(1절) 또는 “악인”(2절)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짐을 가리킵니다.
그 주어진 짐 중에는 물론 핍박으로 인한 고통과 고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과 고난의 구체적인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금된 것을 말합니다(6절). 우리에게도 이러한 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원수 사탄으로 인하여 수 없는 공격과 유혹 속에서 우리의 심령이 시달리고 피곤하며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이 그들을 수금하였던 것처럼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수 없이 공격하여 마음으로 감옥살이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 예로 주님의 말씀이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을 불순종케 만들므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감옥생활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까?
(2) 우리 짐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독”입니다(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 또는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고통 중에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5절). 제 생각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실재로 고아와 과부들이 많이 있었겠다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나 특히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남자들 중 어느 정도의 숫자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적인 의미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적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악인)로 말미암아 고통 중에서 외로움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외로움을 느낍니다. 특히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계시다는 느낌을 들 때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곤 합니다.
(3) 우리 짐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산업 곤핍을 가리킵니다(9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출애굽 가운데 들어갔던 가나안 땅의 곤핍함을 가리킵니다. 즉, 가나안 땅이 가물어서 곡초들과 과수들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이러한 산업 곤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풍족한 땅이라고 믿었던 가나안 땅에서의 곤핍함으로 인하여 과거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죄악 된 생각 속에 있었으면 더욱더 그 짐은 무거웠었을 것입니다. 이 풍족한 나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재미 교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좀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국인 한국을 떠나 풍족한 나라 미국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곤핍함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마치 가나안 땅이 곤핍하여 농사도 안 되고 그런 것처럼 미국에 와서 사업도 시도해 보고 하는데 잘 안 되서 재정적으로 곤핍해지면 그 얼마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4) 우리 짐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난입니다(10절).
오늘 본문 시편 68편 10절을 보면 다윗은 “…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 땅에 가물어서 곡초들과 과수들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하게 된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풍족한 땅에서의 가난 …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풍족한 가나안 땅과 같은 미국에서의 가난 … 물론 여기서는 물질적으로 가난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풍족한 땅에서의 영적으로 가난해 지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경제적으로 풍부해지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영적으로는 가난해 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대신 져 주셨는데 어떻게 짐을 져주셨습니까? 한 4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원수 또는 악인으로 인한 짐,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금됨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통케 하시므로 대신 짐을 져주셨습니다(6절).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독의 무거운 짐을 “고아의 아버지”로서 또한 “과부의 재판장”으로서 그들을 “따뜻한 가정과 같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므로 대신 짐을 져주셨습니다(5-6절)(박윤선).
(3)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곤핍할 때 흡족한 비를 내려주시므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을 다시 좋아지도록 하시므로 우리의 짐을 져주셨습니다(9절, 박윤선).
(4)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은택을 베풀어 주시므로 그들의 짐을 져주셨습니다(10절).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어떠한 무거운 짐들이 우리에게 있을지라도 다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짐들을 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나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무거움도 가볍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