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의인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시편 681-18]

 

 

오늘 아침에 인터넷 뉴스에서 고 심성민 형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은 아들을 먼저 보낸 고 심성민 형제의 아버지인 심진표씨가 아들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진 이였습니다.  "성민아 부디 좋은 곳으로 가라. 잘 가서 많은 어렵고 불쌍한 사람 도와라.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도 잘 살거다"분당서울대병원 영안실에 차려진 故 심성민씨(29)의 빈소에 유족들과 함께 도착한 아버지 심진표씨(62)는 빈소에 걸린 아들의 영정사진을 보자 믿기지 않던 아들의 죽음을 실감한 듯 연신 영정사진을 쓸어내리며 10여분동안 오열해 보는 이들의 눈시울 붉혔다”고 합니다(인터넷). 참으로 이 세상은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 된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죽을 일 쌓”인 세상입니다(찬송가 474장).  이러한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과 눈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도 “참 기쁘고 즐겁구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우리는 평안이 없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돌이켜 기쁨으로 춤을 추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오늘 성경 시편68편3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왜 의인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그 이유 다섯 가지를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로, 의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악인을 패망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 즉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흩으시며, 몰아내시며 결국은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흩으시며, 몰아내시며 또한 망하게 하시되 “연기”가 바람에 순식간에 없어지듯이 주님을 미워하는 악인들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망하게 됩니다.  마치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므로 그들을 망하게 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즉, 의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경험하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사로잡혀 있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해 주시길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므로 기독교를 악평하는 자들을 잠잠케 하시고 구원받은 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더 선포되길 기원하였습니다.  악인들을 망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길 원하는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시편을 계속해서 묵상해 보면서 시편 기자 또한 그렇게 기도를 하였기에 저 또한 그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분명히 우리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일어나사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흩으시고 몰아내시며 결국은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의 공의로우심을 생각할 때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의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의인을 형통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우리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5절). 그 하나님께서는 가족 없이 지내는 외로운 자들, 즉 “고독한 자”들을 “따뜻한 가정과 같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박윤선).  상선벌악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써 그를 “거역하는 자” 또는 배교자들(반역자들)의 거처로 하여금 “메마른 땅”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박윤선).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의인들, 고독 속에서 허덕이는 심령들, 특히 수금된 자들로 하여금 형통케 하십니다.  그 형통함을 누리는 고독한 자는 하나님의 따뜻한 구원의 사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성경 예레미야 22장21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의 잘못된 습관, 즉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치 아니하는 죄악 된 습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않는가 생각해 볼 때 한국 성경에는 “평안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 NASB 성경을 보면 “in your prosperity”, 즉, 내가 형통할 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교훈은 형통할 때나 형통하지 않을 때나 항상 우리의 귀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영적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면 오늘 본문 시편 68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광야”에서도(시68:4)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므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6절).  그리할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의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우리 하나님은 “주의 산업”, 즉 가나안 땅에도 흡족한 비를 내려주시사 곤핍할 때, 즉 가물어서 곡초들과 과수들이 살 수 없게 될 때에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가나안 땅을 다시 좋아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박윤선).  다윗은 하나님께로 이끌어 신앙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출애굽 시대와 광야 시대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회상케 하였습니다(7절ff., 박윤선).  그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백성(10절)을 위하여 가나안 땅에서 주님의 은택, 즉 주님의 선하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는 곤핍할 때에도 자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선하심을 맛보았던 시편 기자는 (34:8)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는 곤핍할 때에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롬8:28).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믿음으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우리는 곤핍할 때에도 믿음으로 복음성가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곤핍함을 돌이켜 풍성케 해 주실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형통할 때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곤핍할 때에도 좋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찬양을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돌이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곤핍할 때에도 맛보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돼야 합니다.

 

넷째로, 의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14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다윗은 오늘 본문 11-14절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 땅 정복에 관련하여 그의 능력의 말씀, 필승의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고 행진하였고 그들의 부녀들은 노래한 것입니다(11절)(박윤선).  특히 가나안 땅 정복의 역사를 보면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가나안 땅의 모든 왕들을 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부녀자들도 능히 적병을 좇아내고 전리품을 나누게 되었습니다(박윤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나 광야에 있었던 것은 ‘양 우리’와 같은 더러운 곳에 있음과 같았으나, 그런 고난 받는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영적 생활은 은이나 금처럼 빛나게 되었습니다(박윤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열왕들을 흩으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안겨다 줬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죽음과의 싸움 싸움에서 종종 패하여 자빠지고 쓰러지므로 낙심과 죄책감과 괴로움에 처할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승리의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 영적 싸움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승리)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고전15:57).  그 감사와 더불어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의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68편 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다윗은 오늘 본문 15-1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하게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성전의 소재지로 정하시고 은혜 베푸셨던 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그 은혜 가운데 다윗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던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산의 산”처럼(15절) “높은 산”(16절), “시내 산”(17절)에 거하시는 하나님, 즉 “높은 곳”(18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곳에 거하는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성경 하박국 3장17-1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안 주고에 근거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십니다.  찬송가 82장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성경 스바냐 3장1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가 슬픈 세상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시며 의인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곤핍할 때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큰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슬픔을 돌이켜 춤을 추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