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

 

 

오늘 우리는 슬픈 소식을 접해 들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사람들에게 인질로 잡혀있었던 한국 분당 샘물교회 23 형제, 자매들 중에 인솔하였던 배형규 목사님이 피살을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CNN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배 목사님의 시신이 천 같은 것에 두루마리처럼 씌워져서 트럭 차에 실려 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야휴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피살된 배형규 목사, 생일날에 비극적 죽음”이란 제목 아래 이러한 기사가 실려져 있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인 탈레반에 의해 살해된 배형규(42) 목사가 자신의 생일날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확인돼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배 목사의 생년월일은 1965년 7월 25일. 마흔 둘의 나이가 된 날 멀리 타국에서 무장 세력들에 의해 머리와 가슴, 배 등에 10발의 총격을 당해 숨졌다.  경기도 분당 청년 샘물교회의 담임목사로 이 교회 부목사를 겸하고 있는 배 목사는 제주도 출신으로 아내와 현재 초등학생인 딸 한 명을 두고 있다”(인터넷).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인의 부인이 되시는 사모님과 초등학생 딸, 또한 그 목사님의 온 가족 식구들, 친지들, 샘물교회 성도님들, 친구들 …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번 고 배 목사님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여러 번 제 자신 스스로가 설교했던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그 다음 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미하였다는 말씀도 생각이 났습니다.  실제로 고 배 목사님이나 지금 텔레반 사람들에게 잡혀있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인 남은 22명의 한국인들, 그들은 어느 면으로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처럼 실제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사도행전 16장의 사도 바울과 실라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만일 제가 지금 그 분들처럼 인질로 잡혀 있다면 과연 그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특히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 S. Lewis는 찬송에 대하여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가장 겸손하고, 균형 잡힌 정신을 가진 능력 있는 사람은 항상 찬송하는 반면, 불평이 많은 사람은 가장 적게 찬송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으면 찬송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균형 잡힌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찬양은 하여야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한 3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18:3; 시96:4).  둘째로, 찬양은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사43:21; 엡1:13-14).  셋째로,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시69:30-31; 시147:11).

 

오늘 성경 시편67편3절과 5절 동일한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는 제목 아래 왜 우리 모두가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한 세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삶이 주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세움 받기를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67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는데 그 첫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하였습니다(박윤선).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 때문 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만방이 구원받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2절).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저는 어제 새벽기도회 때 이사야59장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그 이유를 “너의 죄악”/”너희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죄악/죄의 목록이 이사야 59장 3절부터 쭉 나옵니다.  저는 그 죄악 된 목록 중에 한 3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3가지는 “허망한 것을 의뢰”하는 것(4절), “죄악의 사상”(7절), 그리고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는 것(8절)입니다.  이렇게 이사야59장 3절부터 나와 있는 죄악의 목록 중에 이렇게 3가지만 생각해봐도 참으로 인간의 죄악 됨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인지 그 죄악 목록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한 우리 인간들, 그러나 이사야 59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죄악 가운데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 결코 우리의 행함으로나 공로로 받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엡2:8-9).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마땅히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찬송가410장1절).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 때문에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67편 4절을 보십시오: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시편 기자는 모든 민족이(2절) 주님을 찬송함에 있어서 기쁘고 즐겁게 노래해야 할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이고 (1절) 또한 오늘 본문 4절에서 그 두 번째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또한 치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선벌악의 일을 하시지 않으신다면, 선을 따르는 의인들(성도들)의 생활이 무의미하고 즐겁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평히 그 일을 하시며 통치하시니, 그들의 생활이 기쁘지 않으랴.”  상선벌악의 일을 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의 공평한 판단으로 악인들을 벌하시므로 결국 선을 따르는 의인들(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죄악 된 이 세상은 법정에서도 불공평한 판단으로 인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악한 죄를 범하고도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의 재판장들뿐만 아니라 나라의 지도자들,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공평한 판단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물론 절대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란 헬라어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를 의미합니다”(인터넷).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절대 진리에 대한 결핍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무지한 가운데서 우리 또한 점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한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공평한 판단을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공평한 판단을 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공평한 판단으로 상선벌악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96편 13절을 보면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함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실함으로 백성들 판단하심에 있어서 그는 일어나셔서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94:2) 또한 우리 하나님은 의인에게 갚아주시는 하나님(58:11)이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인들)은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 때문에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 때문에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67편 6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받은 풍년의 축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소산”이라는 단어에 의미에는 어쩌면 ‘증가/증진/확대’ 혹은 ‘생산’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선적으로 농업의 생산력에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단어는 신의 축복으로 인하여 땅이 소산(열매)을 낸다는 개념을 지닌 단어일 것입니다 (WBC).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땅들로 하여금 축복하여 주셔서 소산(열매)을 맺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풍년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이 풍년의 복 이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고의 복인 구원의 복을 은혜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공평한 판단으로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고 기원하였습니다(3, 5절).  찬송하되 우리는 그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찬송해야 합니다(7절).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님의 복’, ‘인복’, 그리고 ‘물질의 복’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복중에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복은 먼저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혹은 그런 후) 인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을 붙여주시길 기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복중의 복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성경 에베소서 1장 3절을 보면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의 선택하심을 받고, 그의 예정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양자 삼은바 됨) 또한 구속 (죄 사함)을 이미 받았습니다(4-7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고 배형규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저는 이 저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여러분들과 함께 바라보길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구원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403장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은 저와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쳐해 있을지라도 주님을 찬송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송케 하시길 기원합니다.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양하면서 주님께로 나아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