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주님의 힘을 노래하십시다.

 

 

[시편 59]

 

 

오늘 저는 욥에 대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익히 알고 있는 듯 한 욥의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탄과 그의 세력이 욥을 칠 때에 과연 욥의 심정은 어떠했었을 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물질도 잃어버리고, 모든 자녀들도 죽고 또한 욥 자신의 생명은 사탄이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극심한 육신의 고통을 겪었던 욥을 생각할 때에 상상을 할 수도 없지만 왠지 욥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에 저는 좀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결국 욥의 말처럼 그들은 욥을 ‘번뇌케 하는 안위 자”(Sorry comforters)(욥16:2)였다는 말씀처럼 제 자신을 볼 때에 좋은 의도로 주위에 고통당하는 지체들을 위로하려고 는 하지만 혹시나 ‘번뇌케 하는 위로 자’였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는 욥 자신은 어떠했었겠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친구들, 위로는 커녕 더욱더 욥에게 괴로움을 더한 친구들이였습니다.  이러한 괴로움 속에 있었던 욥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또한 무지한 가운데서 여러모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제가 만일 욥의 친구였다면 욥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사탄의 어두운 세력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면서 고통 하는 형제, 자매를 바라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건져주시길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무능력함이 철저히 계속 들어나는 것을 느끼고 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능력(권능)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금년 초에 우리교회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 중에 사도행전에 근거하여 4가지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자고 권면하고 기도해오고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기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 말씀의 능력, 사랑의 능력.  이 네 가지 능력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저는 이 능력을 하나로 묶어서 ‘성령의 힘’(Power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힘의 원리(Principle)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 (Power of the Word of God), 둘째로, 성령의 힘의 패턴(Pattern)은 예수님의 사랑의 힘 (Power of love), 마지막 셋째로, 성령의 힘의 파워(Power)는 기도의 힘 (Power of Prayer)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59편 16절과 17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 또한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라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힘이 무엇이기에 다윗은 주님의 힘을 노래하고자 결심하였는지 오늘 “주님의 힘을 노래하십시다”라는 제목 아래 한 4가지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의 힘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므로 우리 또한 다윗처럼 어떠한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쳐해 있을지라도 주님의 힘을 노래(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힘은 보호의 힘입니다.

 

성경 시편 59편 9절, 16절 하반절, 그리고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9절), “…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절 하반 절),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 이다”(17절).  요즘 제가 더욱더 조금이나마 피부 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 수가 없는 참으로 깨지기 쉬운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쉽게 변질되고, 금방 쓰러지고 자빠지고 낙심하며, 속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주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사탄의 세력에 밀리고 져서 결국은 마음의 불신으로 인하여 불순종의 범죄를 짓기 너무나도 쉽습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이던 두려운 상황에 쳐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켜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상황에 지배를 받아 두려움 속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59편에 나오는 다윗이 처해있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사울 왕의 사람들에게 좇기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의 사람들은 다윗의 원수들이요 사악을 행하는 자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1-2절). 이들은 다윗에게 달려왔으며(4절) 개처럼 울며 성으로 다녔습니다(6, 14절).  다윗은 자기를 좇는 원수들을 가리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닌다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묘사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피의) 굶주린 개들이 울면서 우리 주위를 두루 다니다가 결국 우리를 발견하고 좇아온다고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뛰어 그 굶주린 개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하고자 피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개처럼 좇아오며 달려오는 사울의 사람들에게 도망하여 자기의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께 달려가 피신하였던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유일한 살 길이다.  우리가 주위 사방을 바라보면,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에 끌려 정신이 혼란해질 뿐이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낙심할 것뿐이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기쁘고 행복하다.  그 이유는, 그는 ‘산성’과 같아서 우리의 피난처이시요, 그를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견해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위 사방을 바라보면 정신이 혼란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낙심 속에서 영적 침체까지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구원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는 오직 자기의 산성이 되시는 주님의 보호를 사모하여 그 분에게 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보호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찬송가 432장을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2절),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후렴).

 

둘째로, 주님의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성경 시편 59편 10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특히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더욱더 하나님의 인자하심(사랑)으로 견디고 인내하며 더 나아가서 이겨 나아가는 자들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묵상할 때 요나 선지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결국은 물고기 안에 있으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내려갔지만 그 깊은 바다 속에서도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의 깊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라 생각합니다.  깊은 고통 가운데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신앙인…  제가 가끔 불렀던 미국 복음성가 중에 “주께 가오니”(Power of Love)란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이 가사를 보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주로 언제 경험하는가 생각해 보니 제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달게 될 때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는 제 자신이 연약할 때 곧 강함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59편10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자기를 영접하실 줄 확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영접하신다’는 말씀은 ‘나에게 때 맞추어 온신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즉, 다윗은 환난 날에 구원의 하나님이요 다윗을 보호하시는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면서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셔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러한 확신 가운데서 다윗은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모든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고 견뎠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조차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길 인내하므로 모든 역경과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자 인내하시며 마음 아파하심이 더 크고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고통과 역경 속에서 참고 견디므로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의 대조적인 면입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다윗의 원수들은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지만(15절) 다윗은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16절).  여기서 한 2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 교훈은, 악인은 육의 양식인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지만 결국은 배부름을 얻지 못하지만 의인은 주님의 힘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입니다. (2) 둘째 교훈은, 악인은 배부름을 얻지 못하여 밤을 새우지만 의인은 그 핍박과 죽음의 공포 상황에서도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하여 잠을 자고 새 하루 새 아침을 주님과 함께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주께 가오니”라는 미국 복음성가의 나머지 2절과 후렴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눈 열어 주를 보게 하시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매일 나의 삶에 주의 뜻 이루도록 새롭게 되리라 주의 사랑으로”(2절),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후렴).

 

셋째로, 주님의 힘은 공의의 힘입니다.

 

       성경 시편 59편 11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자기의 원수들을 얼른 죽이시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그 죄 값으로 인하여 곤고를 당하게만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은 반드시 천벌을 받는 사실을 명심케 해 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박윤선). 그러나 왠지 악인은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시편 50편 21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  악인들은 죄를 짓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므로 자기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두려움 없이 계속 더 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신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이 불의를 행하는 하나님이신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낮추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다윗은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59:5).  분명히 우리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원수들의 “보응 받는 것”을 목도케 하셨습니다(10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13절).          

 

마지막 넷째로, 주님의 힘은 구원의 힘입니다.

 

성경 시편 59편 1-2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것은 시편 기자 다윗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원수들인 사울이던 압살롬이던 누구이던 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수들에게서 건져줄 것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의 (구원의) 힘을 노래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주님께 노래하기로 결심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바울과 실라 또한 감옥에서 그 다음 날이면 처형을 당하는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 찬미할 수가 있었습니까?(행16)  이것은 예수 전도단에서 섬기시는 홍성건 목사님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홍 목사님은 찬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나 실라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과 같은 경우를 보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하였고 또한 찬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 2가지로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도 바울이나 실라나 다윗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음으로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을 찬양하였던지 아니면, (2) 그들은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예를 들어 구원의 하나님)을 알고 믿었었기에 아직도 건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상황은 두 번째 설명은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다윗이 자신의 억울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믿음으로 찬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고 모여서 엎드려 기다린 후 치려하였는데 이는 그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그의 죄를 인함도 아니였습니다(3절하).  사실 다윗은 허물이 없었으나 그의 원수들은 다윗에게 달려와서 공격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4절).  이러한 억울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주님께서 깨사 감찰하시길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억울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억울한) 상황에서 건지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하나님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힘으로 말미암아 찬송가 474장 후렴을 찬양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저는 이 세상은 참으로 근심된 일과 곤고한 일, 죄악과 죽을 일이 쌓인 세상임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474장을 종종 찬양합니다. 찬양하는 가운데 저는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보호하심 또한 마음으로 기도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어떻게 불안해서 살아 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힘을 믿으면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하므로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힘과 사랑의 힘과 공의의 힘 그리고 그의 구원의 힘으로 우리는 숨질 때 되도록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세움을 받아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목요일 새벽에 “주님의 숲”이란 찬양을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