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판단하시는 하나님 (1)

 

 

[시편 58]

 

 

오늘 오후 양로원에 잠깐 들렸다가 교회로 오는 도중에 라디오를 틀어보니 한국방송에서 LA 대형교회 목사님이 부인을 폭행한 사건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뉴스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목사라는 위치만을 보고 무조건적인 추종만을 추구하는 현재 교인들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습니다.  … 교인들 스스로가 판단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이 뉴스를 접했을 때 좀 놀랬습니다.  또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전도가 막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그 뉴스에서 말한 것처럼 “교인들 스스로가 판단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이미 임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암8:11).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설교 방송들과 수많은 성경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기보다 상황이나 감정 같은 것에 이끌림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로 인하여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한 홍 목사님은 그의 책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인터넷).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가 그 때 그 때 당면하는 상황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판단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는 그분 앞에 잠잠히 머물러서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시편 57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음성은 “마음을 확정하라!”는 말씀 이였습니다. 특히 7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우리 마음을 확정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당면한 재앙(1절)가운데서도 마음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찬양하는 자리까지 오기까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확정되기까지 다윗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냐면 사울에게 좇기면서 도망 다니면서 다윗은 자기의 심정을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6절)라고 털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다윗처럼 억울한 상황에 쳐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늘 본문 시편 58편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오늘 한 가지만 묵상하고 나머지 두 가지는 다음 주에 생각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악인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58편 1-5절을 보면 공의로우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인 악인들을 꾸짖고 계심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의 꾸지람을 한 4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고 계시지 않는지 자아성찰 및 자아 반성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1) 하나님은 잠잠하지 말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8편 1절을 보십시오: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웅변이 은이라면 침묵은 금이라고 할 수 있다”(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침묵 중에는 비겁한 침묵, 더 나아가서 악한 침묵도 있습니다.  악한 침묵이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해야 할 옳은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을 가리킵니다(박윤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 의를 말해야 함에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는 것은 악한 침묵입니다. 성경 이사야 56장10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파수꾼인 목자들을 능히 가리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의 책임은 “짐승들”(9절)이 오면 짖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목자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 떼들이 이리에게 잡혀 먹고 들판이나 산에서 방황하였습니다(겔34장).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원인은 바로 탐욕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탐욕 속에서 “자기 이만 도모하”였습니다(사56:11).  자기 배만 채우면서 양 떼들은 제대로 말씀을 먹이지 못했습니다.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이만 탐낸 이스라엘 목자 들은 “벙어리 개”였습니다.  이러한 잠잠함은 ‘악한 침묵’입니다.

 

이 하나님의 꾸지람을 제 자신에게 적용해 볼 때, 저는 “벙어리 개”라는 이사야 56장 10절 말씀에 제 마음이 찔립니다.  언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민 교회 잘 알려진 어르신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위로의 설교를 하십시오’라는 권면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 목사님 외에도 저는 몇 분 어르신 목사님들에게서 위로의 설교를 하라는 권면을 들었던 기억 또한 납니다.  요즘은 ‘치유의 설교’가 인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치유, 치유’하는 것을 보니 더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저나 우리 설교자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바로 전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면책하는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설교자들이 그 본문 그대로 우리의 죄를 면책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설교 요즘 강단에서 듣기가 힘듬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목사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벙어리 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리나 늑대가 올 때 양 떼를 지키는 개는 당연히 짖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밥만 먹고 배만 불러서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 개는 벙어리 개요 쓸모없는 개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양 떼를 죽이는 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침묵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정직히 판단하여 공의를 말해야 합니다(시58:1).

 

(2) 하나님은 중심에 악을 행하지 말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8편 2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말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럽고 기름보다 유하여(55:21) 공평히 다스린다고 하면서 악한 이스라엘 관리나 지도자들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박윤선).  한 마디로 이들은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위선자는 자신의 거짓된 마음, 악을 행하는 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위선자는 자신의 “들보”를 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들보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 중심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시51:6).  결코 우리는 우리의 말과 마음이 불일치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예식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우리 자신의 본 모습도 잊어버려 착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척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판단하게 하면서 들춰지는 중심의 죄를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바른 믿음, 바른 마음, 바른 행실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은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8편 3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악인은 어릴 때부터 악행을 쌓아 오면서 종내 회개치 아니하므로 죄악이 관영합니다(박윤선).  그 악행 중에 악인들은 특히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악인들의 죄악 된 습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곁길로 나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하므로 곁길로 나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4) 하나님은 소리를 들으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8편 5절을 보십시오: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뱀의 독처럼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독사처럼 악인들은 우리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인들은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나 인도에 퉁소와 북 같은 악기로써 뱀을 유인하는 술사들이 있는데 그들의 퉁소와 북 같은 소리를 들으면 뱀이 그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인들은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악인들은 “귀머거리 독사” 같습니다(4절).

 

      귀 있는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결코 귀를 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므로 각기 제 길을 가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꾸짖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벙어리 개”가 아닌가, 중심에 행악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가,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그러한 가운데 “벙어리 개”와 ‘귀머거리 독사’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자문합니다. 중심에 진실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귀담아 듣기를 사모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부족한 종의 마음과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