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

 

 

"I trust in God’s unfailing love for ever and ever"

  

심리학자 래리 크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갈망한다. 그리고 갈망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관계를 갈망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으면 관계를 회피하는 것 또한 우리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깊은 관계에 대한 건전한 갈망마저 소멸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관계 속에서의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예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지 아니면 머뭇머뭇 거리게 됩니다.

 

이 고난주간에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마음이 좀 괴롭습니다.  이 마음에 있는 괴로움의 원인은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패하고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고 아프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이 무거움과 아픔과 괴로움은 저로 하여금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Unfailing love)을 더욱더 의지케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첫째 아기 주영이 때 주셨던 시편63편3절 말씀인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을 묵상하며 붙잡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시편 52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 준비하였던 월요일에는 예은이에게 주영이의 앨범을 열어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52편 8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며 결심합니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신앙인의 삶은 어떠한 삶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보고 두려워합니다.

 

성경 시편 52편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여….”  우리가 무엇을 보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반드시 벌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두려움이 결핍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죄 용서(forgiveness of sin)와 죄의 결과(consequence of sin)를 구분하지 못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를 범한 후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우리 죄에 대한 결과를 용서를 받았기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죤 오웬 목사님은 그의 책 “죄와 유혹”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죄를 짓더라도 은혜로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은혜를 남용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심각하게 여기기 않는 것은 옳은 신앙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반드시 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범함에 있어서도 두려운 마음이 결핍돼 있습니다. 

 

저는 죄 용서와 죄의 결과는 구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를 저는 다윗에게서 찾아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범죄 한 후 나단 선지자의 면책을 듣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한 죄의 결과로 밧세바와의 첫째 아기도 죽고 다윗의 집 안에 강간, 살인 사건, 쿠데타 사건 등등 무서운 죄의 결과를 다윗은 겪었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 예는 다윗과 시므이의 관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도망가면서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고 돌 던지고 했을 때에 다윗의 장군 중 하나나 가서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삼하16:5-6, 9-10).  나중에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시므이가 나와 다윗을 영접했을 때에 다윗은 그를 용서했지만 다윗은 자기가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라(왕상2:8-9)는 것을 보면 결국 죄 용서와 죄의 결과를 별개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시편 52편에 나오는 죄인은 “도엑”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누군가하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도망 다닐 때에 아히멜렉이란 제사장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에돔 사람 도엑에 그것을 보고 사울 왕에게 밀고하여 결국은 사울 왕의 명령대로 도엑은 감히 85명의 제사장을 다 죽였습니다(삼상 22:9-18).  이 도엑이란 사람의 죄를 한 3 가지로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도엑과 같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1) 도엑의 죄는 스스로 자랑하는 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엑의 죄는 교만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52편 1절을 보십시오: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  선을 교만하게 자랑해도 악하거든, 악을 ‘자랑’함은 그 얼마나 악합니까? (박윤선)  참으로 예리한 묵상입니다.  “선을 교만하게 자랑해도 악하”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자신의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니 그 얼마나 악한 죄입니까? 스스로 자랑하는 교만한 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예레미야 9장24절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 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자임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지 못함을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31).  주님 안에서 자신을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미련함과 연약함이 아닙니까?  왜 우리는 우리의 미련함과 연약함 등을 자랑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29절).

 

(2) 도엑의 죄는 혀로 범한 죄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52편 2-4절을 보십시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죄인의 간사한 혀를 가리켜 “날카로운 삭도 같”다고 다윗은 말씀하였는데 “삭도”가 무엇입니까?  다른 칼과 달리 머리털 같이 미세한 것도 깎는 아주 예리한 것이 아닙니까?  악한 혀가 바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난도질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간사를 혀로 거짓을 말하며 모든 상처 입히는 말을 그 입에서 내어 쏟습니다.  우리는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3장9-10절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으로(혀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니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 도엑의 죄는 살인죄였습니다.

 

성경 사무엘상 22장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도엑은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들인 제사장을 함부로 죽였습니다.  우리는 비록 도엑처럼 살인을 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요한일서 3장 15절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므로 살인죄를 수 없이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범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죄를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회개하면 용서받은 사실로 합리화시켜서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습니다.

 

      성경 시편 52편 7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자라 하리로다.”  강포한 자, 선보다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의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망하게 하면서 스스로 든든하게 하는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힘 인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입니다.  그 이유는 돈으로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쫓는 자는 돈으로 망할 것이고 하나님을 좇는 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 것입니다.  성경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 아삽은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형통의 갈등 속에서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다가 미끄러질 뻔했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인의 결국, 즉, 졸지에 파멸, 전멸, 황폐됨을 보고 자기의 우매 무지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돈을 의지하는 것은 마치 거미줄을 의지하여 기대는 것과 마찬 가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욥8:14-15).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인지를 좀 절실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힘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자기 기준,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주장 등등, 너무나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경이나 고난을 통해서라도 좀 힘이 빠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하였습니다(고후12:9).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9절). 

 

하나님만이 우리의 산성이 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할진대 그는 하나님은 자기의 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하였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나의 힘”이시요 “나의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사30:15).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주님께 영영히 감사합니다.

 

성경 시편 52편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왜 시편 기자 다윗은 영영히 주님께 감사한다고 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주께 이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9절).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강포한 자, 스스로 악을 자랑하며 날카로운 삭도 같은 혀로 간사를 행하는 악인을 벌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주님의 성도 앞에서 주님을 영영히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벌하시는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엑이던 사울이던 결국 다윗을 대적하여 죽이려고 하였던 자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5절).  하나님을 악인을 벌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로 다윗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장막에서 뽑아내며란 말씀은 악인이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자리도 하나님께서 불안전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전하다고 여겼던 “장막”은 악인이 의지하였던 “재물의 풍부함”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벌하심에 있어서 그 재물도 다 없애시므로 말미암아 불안전하게 만드십니다.  성경 학개 1장 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2)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극악에 대한 그의 보응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멸망할 것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의인은, 즉 하나님을 영영히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습니다(8절).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하고 든든한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즉, 상록수와 같습니다.  마치 상록수가 추운 겨울에도 잎이 변함없이 푸른 나무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역경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변함없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며 살기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그 크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합니다. 고통이 크고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 또한 크게 또한 깊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써 최고의 극심한 고통을 십자가에서 겪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죄도 없으신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독생자 예수님에게 진노하시사 벌하신 성부 하나님, 왜 하나님 아버지는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힘(The Power)이신 예수님께서 힘이 없는 자(The Powerless)가 되셔서 그 저주의 나무에 달리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심판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영영히 주님을 감사,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무거운 마음으로 고난주간을 시작한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을 더욱더 의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