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편: 필객의 붓과 같은 혀
[시편 45편]
“인간의 모든 지체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지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세 치 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혀를 제어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어 장치 두 개를 주셨습니다. 바로 치아와 입술입니다. 만일 나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려고 할 때는 이빨로 혀를 깨물어야 합니다. 또한 혀가 치아를 뚫고 나올 때에는 입술을 다물어야 합니다. 꽉 다물어서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어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 치 혀로 인해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입술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입술로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이 독설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전도의 문을 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우리의 혀에 숨어 있는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가 세워야 할 덕입니다”(인터넷).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오늘 성경 시편 45편의 시편 기자는 자기의 혀를 가리켜 “필객의 붓과 같”다고 말하면서 자기 마음에서 넘치는 “좋은 말”로 인하여 왕에 대하여 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그 왕의 위대한 모습에 취하여 자기의 준비된 입술을 기묘하게 사용하여 그 왕에 대하여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한 세 가지로 묵상하면서 왕을 향한 우리의 자세 또한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편 기자의 첫 번째 고백은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우십니다’입니다.
성경 시편 45편 2절을 보십시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필객의 붓과 같은 혀로 왕을 칭송함에 있어서 묘사하기를 왕은 인생보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용모보다 그 덕행이 우수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용모보다 덕행이 우수한 왕은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고 시편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2절). 이것은, 왕의 지혜로운 통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써 지모가 있는 왕으로써 백성을 옳게 다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찬송가 87장 1절과 후렴이 생각납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와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되도다 시온성 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천한 세상 오신 주 참 내 구주님.” 저는 제 입술로 이 찬양을 부르면서 나는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어떻게 들어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할 때 저는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란 책에서 본 “하향성의 삶”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다 “상향성의 삶”을 추구하는 것인데 예수님처럼 하향성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들 좀 더 나은 삶, 좀 더 많은 월급, 좀 더 명예로운 지위를 얻으려고 아등바등한데 우리는 예수님의 하향성의 삶을 이 땅에 재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낮은 곳, 추한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들어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우웬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긍휼은 상향성의 삶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어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긍휼은 직접 그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고난이 가장
극심한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 잡는 것이다. … (하나님의) … 긍휼은
세상에서 가장 잊혀진 곳으로 계속 다가가시는 분의 긍휼이며, 아직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편안히 쉬실 수 없는 분의
긍휼이다”(나우웬).
우리는 성경 이사야 53장 2절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은 세상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없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세상 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아름다움은 “상향성의 삶”일 수가 있지만 예수님의 삶은 “하향성의 삶”이셨기 때문입니다(나우웬).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향성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들어내는 삶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시45:2).
시편 기자의 두 번째 고백은 ‘왕은 승리자이십니다’입니다.
성경 시편 45편 4절을 보십시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하는 왕을 봅니다. 그 전쟁 목적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진실과 겸손한 의”)입니다(4절). 이것을 위하여 시편 기자는 “위엄 있게 타고 승전하소서”라고 축원하고 있습니다(4절). 이 축원은 그가 왕을 승리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영영히 복을 받고 있는 왕은 군마를 타고 전쟁에 출전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의 오른손이 모든 놀라운 일들을 연출하시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시편기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5절). 무적의 장군으로 묘사된 왕은 전쟁에 나가서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습니다. 이 승리의 왕은 바로 만군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영적으로 승리자이십니다 (계19:11-21) (박윤선).
성경 신명기 20장 4절 말씀을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란 말씀이 있습니다. 승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며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우리는 우리이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싸워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승리하셨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사탄과 싸워 승리하셨냐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합니다. 그 질문의 대답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승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5-56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망의 쏘는 죄를 이기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삶의 비결은 우리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31절). 우리는 날마다 “내 몸을 쳐 복종”케 해야 합니다(9:27).
시편 기자의 세 번째 고백은 ‘왕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십니다’입니다.
성경 시편 45편 7절을 보십시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승리하신 주님은 그의 왕국을 건설하심에 있어서 그분의 왕국이 영영한 것은 주님의 왕권은 “공평”이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의 왕국(나라)가 공평한 이유는 왕이신 주님께서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7절). 그러기에 그분의 왕국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 11장 1-5절을 보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리스도 중심된 일꾼을 세워 (파송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는 주님처럼 공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미가 6장 8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본문 시편 45편에 나오는 왕처럼 정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아름다우신 주님이시며 승리자이시며 또한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자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주님만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5편 10절을 보십시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왕후를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왕후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할 수 있는 신자를 비유하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자의 태도는 자기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곧, 그는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주님만 사모해야 합니다(박윤선).
(2) 우리는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5편 11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신자를 아름답게 보시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신자는 바로 주님을 경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경배하는 자에게서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발견하십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겸손히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순종합니다. 그는 예배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예배의 삶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적 자손을 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여기서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는 말씀은 비유로서 그 뜻은 “신자는 복음 전도로 말미암아 영적 자손들을 본다”는 말씀입니다(박윤선). 우리 신자들의 책임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복음 전파하라는 뜻에 순종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왕들이 다 될 것입니다(계5:10)(박윤선).
(3) 우리는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5편 1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의 왕궁으로 들어가 영원토록 주님을 경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여기서 “왕의 딸”도 우리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시편 기자는 우리 신자들이 왕궁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아 왕궁에서 “모든 영화”를 누릴 것을 말합니다(13-15절).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왕궁에 들어가는 소망 가운데서 하향성의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구 싶은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