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나의 극락의 하나님

 

 

[시편 43]

 

 

찰스 스윈돌 목사님에 의하면 기쁨을 빼앗는 요인 중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이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근심, 둘째는 스트레스, 셋째는 두려움. 이들은 모두 엇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근심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터무니없는 염려’입니다.  사건의 결말을 기다리는 동안 근심은 서서히 효력을 드러내는 산(酸)처럼 기쁨을 부식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트레스는 근심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수 없는 상황, 즉 우리 통제 밖에 있는 것에 대해 심하게 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우리는 마음에 동요를 일으킵니다.  지속되는 마음의 동요 속에 스트레스는 가중됩니다.  마지막 셋째로, 두려움은 근심이나 스트레스보다 더 심각합니다.  위험, 불행 또는 고통이 있을 때 느끼는 무서운 불안정감입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은 어떤 일을 사실보다 과장시킵니다. 기쁨을 빼앗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스윈돌).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이 세 가지 요소인 근심과 스트레스와 두려움들을 이겨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모두 스바냐 3장17절 말씀을 붙잡으십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근심과 스트레스, 두려움 같은 것을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우리 안에 근심과 스트레스와 두려움 같은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성령의 열매인 희락)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43편 4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란 “내가 기뻐하는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한 3가지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은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은 그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43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성경 사도행전 12장 1-19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 나오게 하신 구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헤롯왕이 베드로를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였었지만 주님의 구원의 능력 앞에서는 그 모든 쇠사슬이나 군사들 및 감옥, 쇠문 등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헤롯왕과 불신자 유대인들의 “모든 기대”에서 베드로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행12:11).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사 베드로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교회의 간절하고 지속적이며 함께 기도한 것이 온전한 믿음의 기도와 기대가 아니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뜻인 베드로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후 내세울게 뭐가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기도의 공로를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인데 우리가 내세울 공로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들로써 찬송가 474장 찬양의 후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참으로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 많고, 곤고한 일 그리고 죄악 된 일이 많은 세상인데 그 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기가 쉽지 않고 또한 쉬는 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참 죽을 일 쌓인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평안히 쉴 수있는 것은 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는 기도로 하나님께 고소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고소하는지 1절에서 한 두 문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구는 “경건치 아니한 나라”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자비한 나라”로서 죤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이방적인 불신앙으로 동하여 다윗을 핍박한 사울과 그 정권을 가리킨 듯하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박윤선).  두 번째 문구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입니다.  시편 기자는 무가내하한 악인인 간사하고 불의한 자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악인들로부터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경건치 아니하였던 자들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을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주님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저런 삶 속에 예기치 못한 어려운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사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자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사 우리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져주시고 또한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한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은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은 그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43편 2절을 보십시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편 기자는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악인들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고통 중에서 슬퍼하면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기를 버리셨는지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 어찌하여 …”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간절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 “어찌하여”, 즉 “왜”(why?)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지 않았는가라는 느낌 가운데 “왜”라는 질문은 우리 또한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의 “어찌하여”라는 기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원망에서 나온 기도라기보다 “벌써 하나님의 응답을 얻은 것과 같은 신념에서 나온 것”입니다(박윤선).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힘”이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성경에는 “힘” 그리고 영어로는 “strength”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원어 “마우즈”는 실상 “피난처”를 의미합니다(박윤선).  시편 기자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2절).  그는 비록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고통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난처가 되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피하여 주시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시편 기자처럼 “어찌하여”, 즉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역경으로 인하여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을 때에 우리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안겨서 “왜?”라는 질문식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의 영혼이 낙망하며 불안하였습니다(5절).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힘으로 다시금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시편 18편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힘이 없어 철저히 무기력함을 깨달아 가는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반석이 되시며 요새가 되시며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시며 산성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어 다시금 독수리처럼 창공을 나는 신앙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주님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은 이유는 주님은 그의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43편 3절을 보십시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그의 원수들의 간사하고 불의한 행동으로 인하여 낙망하고 불안하고 있었을 때에 그 마음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의 빛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그 어두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낙망하며 불안해하는 가운데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 어두움에 익숙해 져 가면서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바랄 볼 수 있는 힘(혹은 믿음)조차도 상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지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빛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어두움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김없이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이행의 신실성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곧, 시편 기자는 어두운 고통의 터널 안에서 빛 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였는데 특히 그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는 빛 되시며 진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자기를 주님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3절).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그는 거하길 원했습니다. 요나서 2장 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결국은 “깊음 속 가운데” (3절) 물고기 안에 있었던 요나 선지자는 다시금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 결국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9절).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어서 새 힘을 주시므로 오늘도 우리를 약속의 땅이 저 높을 곳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극락의 하나님, 우리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하나님, 그러기에 우리는 낙망하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힘(피난처)과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나의 극락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나의 구원자, 나의 힘, 나의 인도자가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