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편: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시편 42편]
사탄의 경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걱정, 두려움, 욕망, 슬픔 그리고 자만심과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상품 진열대 한 쪽 편에 "세일하지 않음" 이라는 낡아 빠진 꼬리표를 단 물건이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왜 이 물건은 세일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사탄은 "다른 물건들은 충분한 여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물건 없이 나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 일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물건은 "낙심"이라는 것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인터넷). 참으로 이 사탄의 무기인 “낙심”은 우리 신앙생활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낙심이란 무엇입니까? 낙심은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강준민). 다시 말하면, 낙심이란 기가 꺾인 상태입니다. 낙심을 낙망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낙망이란 소망이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낙심 대신에 낙담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낙담이란 담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낙담이란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낙심이 꿈을 성취하는 사람의 적이 되는 것은 포기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저는 개인적으로 주위에 참으로 낙심하고 낙담하며 낙망할 수 있는 상황에 쳐해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을 생각해 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비전이 보이질 않고 참으로 희망찬 새해가 아닌 낙망과 절망케 하는 이런 저런 일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난관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성도들은 난관에 처하더라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난관에 축복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난관에 축복은 무엇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한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난관의 축복은 우리는 난관을 통하여 우리의 인격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는 난관을 통하여 더욱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2) 난관의 축복은 우리는 난관 가운데서 오히려 감사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어느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불평하는 사람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불평은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어 보이는 참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우리 성도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감사할 조건이 없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선물로 받은 구원의 은총을 생각할 때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3) 난관의 축복은 우리는 난관으로 말마임아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게 됩니다.
다른 것들을 붙잡다가도 난관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고난이 더욱더 크면 클수록 우리는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말씀을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4) 난관의 축복은 우리는 난관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욱더 의지하게 됩니다.
특별히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벽기도회 시간에 주신 창세기 18장 14절인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욱더 의지하며 사모하며 기대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시편 42편에서 난관에 처한 시편 기자를 봅니다. 그는 난관에 처했을 때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며 이겨 나아간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 11절).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라!”는 제목을 걸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어떻게 하는지 한 2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 삶 속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낙망하지 않고 갈망합니다.
성경 시편 42편을 보면 “낙망”이란 단어가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5, 6, 11절). 왜 시편 기자는 낙망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낙심할 만한 역경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 낙심할 만한 역경이란 자기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므로 난관에 봉착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 난관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을 바로 시편 기자의 원수들의 압제였습니다(9절). 그리고 그 압제란 다름 아닌 시편 기자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였습니다(3, 9절). 결국 시편 기자는 이러한 원수들의 지속적인 비방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3절)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으셨다는 생각까지 하였습니다(9절).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충분히 낙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그 징계가 오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지쳐 낙망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그 구원의 손길이 더딛는 가운데 오히려 원수들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절)라는 비방이나 조롱을 지속적으로 듣게 될 때에 우리는 충분히 낙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 낙망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낙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패턴을 경계해야 합니다: 범죄 하나님의 징계 고난 낙망 불신.
우리는 낙망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시편 42편에서 가르쳐 주는 교훈은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2편 2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편 기자는 낙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을 갈망하였는데 그의 갈망은 어떻게 표현 되었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기에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1절). 이러한 갈급함은 시편 기자가 낙망한 가운데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인간의 철저한 무기력함과 무가치한 존재를 깊이 인지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더 갈망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나우웬).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5, 11절)라고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선포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않고 주님을 기억합니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면서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2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편 기자는 과거에 종교적 지도자 격으로 활동한 사실을 기억하고 더욱 상심하였습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그는 현재에 하나님께서 떠나신 듯한 고난에 처하고 보니,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남들까지 주님께로 인도하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마음이 더욱더 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는 역경 속에서 낙망한 가운데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더욱더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이때에 시편 기자는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낙심될 때에 낙심을 기르지 말고, 즉시 그것의 방비책을 취함이 지혜입니다(박윤선). 그 방비책은 바로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란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들, 그렇게도 잊어
버리려고 애쓰는 상처 입은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꼭꼭 마음 깊은 속에 숨겨
두고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에게도 보이거나 알리고 싶지 않은 이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 자신에게
서도 잊어진 듯 하겠지만 결국은 또 다른 고통스러운 일로 말미암아 다시금
생각나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시금 그 기억들을
눌러서라도 잊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리할수록 상처만 더욱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상처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닫힌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만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믿지
못하면서는 하나님께도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죄악 된 본능입니다.
‘진정한 치유의 과정은 나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다시금 기억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것입니다’(나우웬).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주님을 기억하되 주님의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끊임없이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2편 8절을 보십시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기자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가운데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차 그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송케 할 줄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말씀하신 가르침을 순종하였습니다(눅18:1). 그럼 그의 기도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 시편 기자는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했습니다[(시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2) 시편 기자는 자기 원수의 비방 내용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했습니다(10절).
우리의 삶 속에는 너무나 예기치 않은 일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서 괴로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과 괴로움이 오래가면 갈수록 우리는 낙망할 수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 11절). 우리는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하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을 기억하기보다 주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그의 십자가의 고통에 우리의 고통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가운데 주님의 고난의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빌1:29).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하지 않고 불안하여 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그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시편 42편 5절과 11절 말씀을 내 영혼에게 선포하며 나아가므로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세움을 받기를 기원하면서,
쉽게 낙망했던 제임스 목사 나눔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