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편: 빈약한 자를 권고하십시다.
[시편 41편]
새해를 맞이한 지 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1월1일 첫째 날에 가족 모임들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고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제 자신의 사랑하지 못한 죄를 깨닫게 해주시사 그 죄를 고백하여 용서 받으므로 자유의 기쁨 또한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제 화요일 새벽기도회 때와 오늘 수요일 새벽 기도회 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4-9장 말씀을 통하여 죄를 다스리지 못했던 가인의 모습(4장), 죄가 관용한 시대에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창6:8),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사람, 주님과 동행하였던 노아의 모습(창6:9), 홍수 후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먼저 단을 쌓고 예배하였던 노아의 모습(창8:20), 그러나 결국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는 죄를 범하는 모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창9:21). 이러한 노아의 대조적인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아벨의 모습과 가인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결국은 죄를 다스리지 못한 노아의 모습 속에서 가인의 모습을 본 후 제 주위에 사랑하는 지체들의 가까운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유난히도 듣게 된 새해 첫 삼일 이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죄의 파워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악 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가정 식구들이던 교회 식구들이던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과 눈물, 괴롭게 하는 것을 보던지 들으면서 과연 한 사람의 죄악 된 선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며 도와야 할지 오늘 본문 시편 41편 말씀으로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41편1절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빈약한 자”는 영어로는 “the helpless”(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자, 무력한 자)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이 히브리 단어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보면 “poor”(가난한) 또는 “weak”(연약한)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운데 낮아진 상황, 즉 낮은 지위 가운데 억압 받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죤 맥아더). “빈약한 자”의 의미는 “빈핍한 자(출30:15), 병약자(창41:19), 마음이 약한 자(살전5:14)”등을 가리킬 수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모든 고난당한 자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성경은 이러한 빈약한 자들을 권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빈약한 자를 동정하여 생각해 주는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빈약한 자를 권고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빈약한 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5가지 사항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그들을 업신여기고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무시해서는 아니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에 대하여 악담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1편 5절을 보십시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빈약한 가운데 있었을 때에 그에 대하여 악담을 하였는데 그 악담의 내용은 ‘언제 다윗이 죽을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담의 내용은 다윗이 언제 땅위에서 사라질 것인지 그의 죽음을 원하는 악담 이였습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받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바라보는 악인 원수들의 바람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렸다고 생각하였던 불신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그리 외쳤습니다(눅23:21).
셋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향하여 간악한 계획 세워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시편 41편 6절 말씀 보십시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자기를 사랑하는 듯이 찾아와서 아첨하는 말을 하면서 다윗의 정형을 살펴 가지고 거짓을 꾸며 마음속에 간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간악한 계획은 다윗에 대하여 악선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앞에서는 사랑하는 듯 아첨하다가도 밖에 나아가서는 다윗에 대하여 거짓말을 쉴 수 없이 내뱉으면서 그에 대한 악선적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빈약한 자를 방문하여 그의 앞에서는 사랑하는 듯 아첨하면서 그의 뒤에서는 그에 대하여 악선전을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미워하여 그에 대하여 수군 수군거리며 해하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시편 41편 7절을 보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얼마나 수군수군하기가 좋은 기회입니까? 또는 우리가 시기하고 있었던 사람인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뒤에서 말할 좋은 기회입니까? 저는 이러한 수군수군은 그 빈약한 자를 또 다시 죽이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또 그 사람에 대하여 수군수군하고 다니면 그 고통에 또 다른 고통을 부여하는 일밖에 안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배반하고 대적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시편 41편 9절을 보십시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기서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는 말씀은 발로 차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의 악행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빈약한 자를 어떻게 권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 3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성경 시편 41편 4절 상반절과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체험한 성도는 다른 성도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동정하면서 그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집니다. 자기도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고통을 당하여 본지라 다른 이의 고난과 고통을 공감하며 동정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기자 다윗은 자기 자신이 주님께 범죄 한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고쳐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4절). 과연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데 그 자녀를 외면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빈약한 자를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빈약한 자를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다윗은 자기가 신뢰했던 가까운 친구에게도 배반을 당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어느 면으로 보면 다윗은 범죄하므로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죄를 범할 때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고 그를 배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다시 신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서로를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빈약한 자를 일으켜 줘야 합니다.
성경 시편 41편 10절을 보십시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 우리 주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의 징계는 우리를 그저 무조건 무너트리시려고 하시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징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너질 부분들은 철저히 부서트리시면서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를 세우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약속하시고 세워 나아가심에 있어서 우리를 그 주님의 세우는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마16:18).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빈약한 형제, 자매들을 권고하여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므로 그들을 신뢰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행이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의 징계를 받으므로 고통당하고 있는 지체에게 가서 또 다른 징계를 내리는 언행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받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건지심의 축복입니다.
성경 시편 41편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를 재앙의 날에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빈약한 자를 건져주는 자를 건져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체험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은 ‘보호의 축복’ 입니다.
성경 시편 41편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 하나님께서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를 보호해 주시며 살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빈약한 자를 보호해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은 ‘세상에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41편 2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 즉, 하나님께서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도 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께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은 ‘치유의 은총’입니다.
성경 시편 41편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치유의 하나님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병중에 있을 때에 다 고쳐 주시므로 다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빈약한 자를 우리는 긍휼이 여기며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신뢰해주며 또한 그를 일으켜 줘야 합니다. 결코 그에 대하여 악담하며 간악한 계획을 세워 악선전 하며 수군수군 하므로 그를 또 한 번 죽이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결코 그를 배반하며 대적하여 더 이상 그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도록 좌절과 절망을 그에게 줘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빈약한 자이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징계를 받아 모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생각할 때 그의 사랑과 은혜, 긍휼하심에 힘입어 우리 또한 빈약한 자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축복, 보호의 축복, 치유의 축복 그리고 세상에서도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사랑으로 빈약한 자를 사랑하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