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우리를 향하신 셀 수도 없는 주님의 생각

 

 

[시편 401-10]

 

 

오늘 새벽기도회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저의 죄를 들춰내셨습니다.  그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므로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 말씀이란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선포한 시편 39편 말씀 중 ‘언행을 조심하라’(1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선포한 후부터 오늘까지 한 일주일을 돌아볼 때에 입을 조심하지 못하고 말하고 난 후에야 후회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 것을 …,’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말을 왜 내가 했지?’, ‘그냥 좀 잠잠히 듣고만 있을 것을 …’ 등등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혀를 조심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인 ‘언행을 조심하라’는 교훈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있었다면 대화를 하기 전과 또한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말을 삼가하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절제하였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삶,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더 합당한 신앙인으로서 세움을 받게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기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40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셀 수도 없을 정도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시편 139편 17-18절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이 셀 수도 없을 정도라는 말씀, 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인지 과연 우리는 그의 사랑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40편 5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시는 주님은 어떠한 주님이신지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 이십니다.

    

성경 시편 40편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이 단계를 저는 ‘갓난아기’ 단계 혹은 ‘응아 응아’하는 단계라 생각합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느라고 응아 응아 마구 울어대는 것처럼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주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갓난아기처럼 계속 울어대지 않고 멈출 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고 중단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하는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하는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습니까? 그렇게도 하나님께 부르짖었건만 응답되고 있지 않아 보일 때에 우리는 얼마나 좌절하고 낙망하여 사람과 환경을 원망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포기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그러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절).  기도 응답이 더딜 때에 이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견인지구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박윤선).  우리는 다윗처럼 난관에서 건짐 받기 위하여 견인지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 또한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좀 끊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1-8절에서 기도의 비유로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막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1절) 주신 말씀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자꾸만 그 원한을 풀어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재판관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7-8절).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또한 오래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그에게 돌아오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들 수가 있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1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은 우리를 향하여 셀 수 없는 생각을 가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그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심에 있어서 오래 참으시지를 못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향하여 온갖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표현할까 고민하며 생각하는 중에 그 자녀가 너무 힘든 가운데서 어머니에게 간절히 도움을 부탁할 때에 어찌 그 어머니가 속히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생각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요 또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심에 있어서 오래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걸음을 견고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40편 2절을 보십시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이 단계를 저는 ‘걸음걸이’하는 단계로서 한 한살부터 두세 살 나아 정도라 생각합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시편 37편31절 말씀에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걸을 실족케 하는 요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요소들은 다름 아닌 “투기”, “불평” 그리고 ‘분노’입니다.  이 요소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말씀)을 두는 것입니다.  심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적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우리의 걸음을 실족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0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신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2절).  즉, 다윗은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은 구원하셔서 그의 걸음을 견고케 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반석 위에 세워 놓으셨습니다(2절).

 

        저는 개인적으로 “반석”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몇 몇 성경구절들이 생각나는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 시편 61편 2절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나보다 높은 바위”…  자기 자신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바위”에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하였던 다윗처럼 저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능력, 그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저의 눌렸던 마음, 즉 “우고에 싸여 기진맥진해 가고 절망”(박윤선)가운데 있는 마음에 힘을 주시가 저의 걸음으로 하여금 견고케 하시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명심하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향한 그의 생각이 셀 수 없을 정도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보다 높은 바위에 우리를 인도하시사 우리의 걸음을 견고케 하시는 주님이심을 잊지 마십시다.  

 

셋째로,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시는 주님은 우리 입에 새 찬송을 두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40편 3절을 보십시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이 단계를 저는 ‘성장하는 단계’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단계는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 다윗이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난관 가운데서 부르짖은 후 기다리고 기다리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시사(1절)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그의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그의 걸음을 견고케 하셨습니다(2절).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입에 하나님께 드릴 찬송인 새 노래를 두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절).  여기 “새 노래”는, 구원을 얻은 자가 그 구원의 새 경험으로 인하여 부르는 노래입니다(박윤선). 하나님의 구원의 “새 경험”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새 노래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 삶 속에 적용됩니까? 우리 삶 속에 부딪히는 난관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여 건져 달라고 부르짖는 가운데 그 때 그 때 순간 마다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음과 입술을 열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단3:18)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아니하실 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처럼(행16:25ff) 우리도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찬송가 404장을 제 입에 두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저는 측량 다 못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할 때에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므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시는 주님은 우리 귀를 여시는 주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40편 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여셔서 새 노래를 그를 찬양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귀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귀를 여시사 그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귀가 뚫린 듯이 그의 영적 지각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칼빈).  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바로 순종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삼상15:22).  박윤선 박사님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정하신 모든 제물 드리는 제도는, 예물이나 번제물 같은 것을 원하신 까닭이 아니고 그것들을 드리는 자의 순종을 요점으로 생각하신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된 다윗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40:7).  즉, 다윗은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려고 출두하여 그 상전 앞에 대비하고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을 행하려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이 두루마리 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말씀을 순종하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적 자세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자세 …  다윗의 마음 자세를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절).  하나님의 율법이 심중에 있는 자는 오직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다윗은 그러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주님 환난과 역경 중에서 그 주님께 부르짖고 그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성도는 그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뿐 만 아니라 그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9-10절).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은 후 모든 회중 앞에서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셔 셀 수도 없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주님, 우리는 그 주님의 인자와 진리를 회중 앞에서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향하여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생각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 기도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