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시편 3821-22]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시선으로 기독교 사랑과 신앙 전파에 노력했던 20세기 위대 한 사상가 C. 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란 책을 보면 그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피조물들이 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C. S. 루이스가 던졌던 이 질문을 던져보신 분이 계십니까? 특히 여러분 중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왜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시고 그 고통을 그냥 방치하고 계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져보시지 않으셨습니까? C. S. 루이스는 인간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보이는 이 고통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이렇게 풀었습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그는 고통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기 위해,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고통은 개심(reform, repentance)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며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통”을 생각할 때 한 2가지로 구분합니다: 단련의 고통(Suffering of Discipline)과 바르게 함의 고통(Suffering of Correction).

 

(1) 단련의 고통

단련의 고통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 가운데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통으로서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성장시켜 주시며 성숙케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고통입니다. 그 한 좋은 예는 바로 성경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입니다. 욥이란 사람은 성경 욥기 1장 1절을 보면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사단에게 욥을 이렇게 자랑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1:8; 2:3).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경에 예수님 외에 욥처럼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없어 보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소유물만 다 잃어버렸을 뿐만(1:13-17) 아니라 자녀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19절). 심지어 그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므로(2:7)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는 고통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8절).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하고 정직한 욥을 쳐서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욥기 4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바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즉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신앙의 축복을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징계의 고통

 

징계의 고통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결과로 고통의 징벌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케 하시므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자 주시는 고통입니다. 이 징계의 고통의 좋은 예는 바로 오늘 본문 시편 38편에 나오는 다윗이란 인물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시편 38편 21-22절 말씀 중심으로 시편 38편 전체를 묵상하면서 이 징계의 고통을 겪었던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주목하면서까지 훈계하시는(시32:8) 메시지를 받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38편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한 2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질문은, 하나님께 범죄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통은 무엇인가라는 것과 (2) 둘째는, 이 고통을 받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범죄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범죄 한 우리들이 받는 고통을 다윗은 시편 38편 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 한 후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을 때 성령의 검인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을 찌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누르십니다. 이 ‘누르다’라는 표현은 시편 32편 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여기서 주님의 손이 우리를 주야로 누르신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우리가 확실하게는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3절).

 

다윗은 주님의 살이 자기를 찌르고 주님의 손이 자기를 심히 누르시므로 말미암아 한 3가지 고통을 겪게 됩니다.

 

(1) 그 고통은 바로 육신의 고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3절과 7절을 보십시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다윗은 주님의 살이 자기를 찌르고 주님의 손이 자기를 심히 누르시므로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건강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력이 쇠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한 고초를 당하여 눈까지도 어두워졌습니다(10절). 한 마디로, 다윗은 육신의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하다가 건강을 잃으므로 육신의 고통을 겪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죄를 지적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책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5장 1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육신의 질병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실 진대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나서도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계속 범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2) 그 고통은 바로 마음의 고통입니다.

 

그는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4절) 마음에 평안함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3절) 마음이 불안하여 심음까지 하였습니다(8절). 그 결과 그는 육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입고(5절) 슬픔 중에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6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짓고 나서 그 죄로 인하여 심령의 불안을 느낍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심령의 불안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에 그 죄로 인하여 마음으로 아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므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고 마음도 상하게 되면 결국은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8절에서 ‘마음이 불안하다’는 말씀은 시편 6편3절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에 ‘영혼이 심히 떨리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고통을 장기적으로 경험할 때에 오는 결과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지 인간의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오는 마음의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에서 우리는 신음 혹은 탄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윗이 겪었던 마음의 고통은 바로 외로움 또는 고독함 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1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섰나이다.” 육신의 고통과 상처 및 슬픔, 마음의 불안 등으로 마음의 짓눌림도 참으로 괴롭고 힘들겠지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사람들까지도 우리를 외면하고 멀리할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왠지 욥이 생각납니다.  육신의 고통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더 나아가서 그의 아내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라고 했을 때 욥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일 가까운 한 몸인 아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어리석은 말이나 하고 …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고립시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힘, 또한 의지하는 친구들이나 친척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징계하시되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친척들까지도 끊으실 때도 있습니다.

 

(3) 그 고통은 바로 영혼의 고통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2절을 보십시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이것은 다윗의 원수들의 행동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올무와 괴악한 말과 궤계를 써 가면서 다윗을 해하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속여서라도 그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다윗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의 사랑하는 자들이나 친구들이나 친척들까지도 다 그를 멀리하였는데 그 와중에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생명을 찾아 해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 영적 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려고 애쓸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케 한 후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여 회개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에는 주님을 배반하고 배도하여 믿음에서 떨어져 영원히 멸망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다윗에게 제일 큰 고통이 되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멀리하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멀리하시고 또한 그를 버리실까바 두려워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의 느낌이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고 그를 버리지도, 멀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심히 누르셨고 또한 자신의 살로 다윗을 찌르셨습니다(2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가까이 계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길 원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의 죄에서 건져(구원해)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3가지로 성경 시편 38편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침묵 가운데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다윗의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다윗을 해하려고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할 때에 그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12-13절).  즉,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간교하게 자기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그를 멸망시키려고 권모술수를 써가며 해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입을 열어 어떠한 변호를 하여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14절).  오히려 그는 귀도 막고 입도 막고 침묵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좀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할 말들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그를 둘러싸인 원수들이 “괴악한 일을 말”(12절), 즉 “다윗을 멸망시킬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을 때(박윤선), 다윗은 귀먹은 자 같이 그 말들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대적하는 자들의 말들을 다 들으면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귀를 막아야 할 때는 좀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의 음성들에 대하여 귀를 막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윗처럼 벙어리 같이 입을 다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침묵할 때는 좀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처럼 귀먹은 자같이 좀 귀도 막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않고 좀 침묵하는 가운데 주님께 조용히 나아가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 간구하므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직역 하면 “당신 곧, 당신께서 응답하시리이다.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입니다(박윤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였던 다윗처럼 우리는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입을 열어 우리의 죄악을 주님께 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8절을 보십시오: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놀랍습니다.  그는 분명히 원수들의 죄악을 보았을 텐데 그들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기의 죄악의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습니다. 이 다윗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게 만듭니다.  즉, 원수들의 핍박과 역경,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사람들에게 귀를 열고 이런 저런 비방이나 비난 같은 것을 들으면서 스트레스 받고 아파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입을 열어 이런 저런 변명할 필요도 없이 오직 잠잠히 침묵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대적과 핍박을 원망과 불평 등의 기회로 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회로 삼았던 다윗은 우리로 하여금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쏟아내면서 자신의 죄까지도 쏟아내는 기회로 삼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우리는 선을 좇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20절을 보십시오: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 하나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 하면서 선을 좇는 삶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풀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즉,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수들의 대적 가운데서도 선을 좇는 다윗의 삶 ….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사탄의 역사도 그 만큼 커지고 거세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선을 행했을 때 그의 원수들의 역사를 오늘 본문 19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활발하게 그리고 강하게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래도 선을 좇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원수들에의 소리에 귀를 막고 그들에게 입을 막고 주님에게만 귀와 입을 열어 그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간구하는 가운데 나의 죄를 자백하며 더욱더 선을 좇은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을 좇는 가운데서 그의 원수들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절).

 

우리에게 제일 큰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계시고 또한 우리를 버리셨다는 느낌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으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시므로(forsaken) 우리를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forgiven).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축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고통 가운데서 특히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큰 고통을 통하여서라도 나의 큰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며 회개할 수 있길 기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