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12-22]

 

 

여러분은 최상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어느 목사님은 그의 책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최상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 사명에 부응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흔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깨달으면 비로소 세상이

깨닫기 시작한 것 같고, 자신이 포기하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 슬쩍

끼어든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정 부분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나면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사는 변함없이 도도히

계속 흘러간다.  하지만 조용히 사라지거나 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이걸 다 이루어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즉시 “안심하고

죽어도 됩니다”라고 말하겠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기

때문이다”(인터넷).

 

하나님의 큰 역사인 구원의 사역의 커다란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어떤 맥락 가운데 우리를 부르셨는지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역사적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지 우리 각자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사명에 부응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어떠한 삶인지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을 이루는데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주어지는 역경과 어려움, 그리고 사탄의 역사 속에서 오는 유혹과 핍박을 감당하며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경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개개인의 삶 속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즉, 사명 완수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주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에 나오는 시편 기자 다윗은 주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경험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한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경험하는 자의 삶은 어떠한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경험하는 자는 침묵 가운데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성경 시편 38편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시편 기자 다윗의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그를 해하려고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할 때에(12절) 다윗은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13절).  즉, 다윗은 자기의 원수들이 권모술수로 자기를 해하려할 때에 귀도 막고 입도 막고 침묵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좀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아니할 말들은 듣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그를 둘러싸인 원수들이 “괴악한 일을 말”(12절), 즉 “다윗을 멸망시킬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을 때(박윤선), 다윗은 귀먹은 자 같이 그 말들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대적하는 자들의 말들을 다 들으면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귀를 막아야 할 때는 좀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의 음성들에 대하여 귀를 막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윗처럼 벙어리 같이 입을 다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할 때는 좀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간교하게 자기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그를 멸망시키려고 권모술수를 써가며 해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그는 입을 열어 어떠한 변호를 하여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4절).  

 

어쩔 때 우리는 입을 열어 변호했다가 문제가 더 커진 경험을 했었을 것입니다.  변명이란 더 문제를 크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한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플라 톤에게 물어 보았답니다: "선생님! 왜 변명을 안 하십니까?"  그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난을 종결시키는 것은 나의 변명이 아니다.  그들의 비난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올바른 행위뿐이다"(인터넷).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간혹 오해로 인해서 비난을 받을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해를 풀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고 도리어 실이 꼬이듯이 더 오해가 깊어질 때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때를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가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인내하시면서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인터넷).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써서 괴롭고 힘들 때에 좀 침묵하고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귀를 열어 이런 저런 사람들의 말에 너무 민감하게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변명한다고 해서 오해가 풀리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처럼 우리는 귀먹은 자같이 좀 귀도 막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않고 좀 침묵하는 가운데 주님께 조용히 나아가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 간구하므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락하시리이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당신 곧, 당신께서 응답하시리이다.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입니다(박윤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였던 다윗처럼 우리는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경험하는 자는 입을 열어 내 죄악을 주님께 고합니다.

 

성경 시편 38편 18절을 보십시오: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놀랍습니다.  원수들의 죄악을 보았을 텐데 그들의 죄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자기의 죄악의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다윗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게 만듭니다.  즉, 원수들의 핍박과 역경,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사람들에게 귀를 열고 이런 저런 비방이나 비난 같을 들으면서 스트레스 받고 아파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입을 열어 이런 저런 변명할 필요도 없이 오직 잠잠히 침묵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 거룩한 임재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대적과 핍박을 원망과 불평 등의 기회로 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회로 삼았던 다윗은 우리로 하여금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쏟아내면서 자신의 죄까지도 쏟아내는 기회로 삼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38편 16-18절을 보면 우리는 다윗이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기도 내용은 오늘 본문 16절에 나와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다윗의 기도의 내용은 2가지였습니다. (a) 하나는 다윗은 자기가 실패하면, 그의 원수들이 기뻐할 터이니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였고 (b)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실패하면, 그의 원수들이 더욱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크다고 생각할 터이니,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원하였습니다(박윤선).  이 기도는 실제로 보면 하나님이 영광을 추구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간구하고 있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하지 않으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원수들이 다윗 자신을 향하여 “망자 존재”, 즉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의뢰하며 기도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기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도리어 욕을 끼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자기의 간구를 들어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2) 둘째 기도 내용은 우리가 이미 읽은 18절 말씀에서 본 것처럼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자기) 앞에 있었습니다(17). 

 

3절 말씀에 비춰서 다시 말하자면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뼈에 평안함이 없”을 정도로(3절)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의 죄를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의 손이 (주야로) 다윗을 심히 누르실 때에 결국 다윗은 자기의 죄를 토설(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2:4, 38:2).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입을 열어 충분히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환난을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죄를 고백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좀 침묵하고 하나님께는 입을 열어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믿고, 경험하는 자는 선을 좇습니다.

 

성경 시편 38편 20절을 보십시오: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 하나이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선을 좇는 삶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풀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즉, 그들은 다윗을 대적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신앙입니다.  원수들의 대적 가운데서도 선을 좇는 다윗의 삶 …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사탄의 역사도 그 만큼 커지고 거세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선을 행했을 때 그의 원수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19절).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 활발하게 그리고 강하게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래도 선을 좇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원수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그들에게 입을 막고 주님에게만 귀와 입을 열어 그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간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더욱더 선을 좇은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을 좇는 가운데서 그의 원수들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완수하고자 전심전력하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주님을 알고, 만나고 날마다 경험하는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물줄기가 우리 삶 속에서도 흘러야 합니다.  그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경험하는 우리는 오늘도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하나님을 잠잠히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의심의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