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나의 죄로 인하여

 

 

[시편 381-12]

 

 

김준수 목사님의 "마음의 치유"란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글이 있어 나눕니다:  "우리가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가리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자기 안에 있는 상처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껍질인 것이다.  사람들은 겉으로 자신을 잘 포장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내면의 상처나 열등감도 무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 중심으로 저는 “가면 쓰기”란 제목아래 글을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

 

“나의 참 모습을 진솔하게 또한 투명 있게 할 때에 나의 이 모습 이 대로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주님 안에서의 친구 한 명이라도 없다면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가면을 쓰고 또 쓰면서 살아가면서 나의 참

모습조차도 잊어버리고 가면 쓴 자신의 모습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가면 쓴

자신의 모습을 참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더 불쌍한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조차 가면을 쓰고 나아가는

자라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조차 경건의 모양으로만 잘 포장해서

모양새나 신경 쓰면서 거룩한 척, 믿음이 참 좋은 척하면서 예배 가운데

나아간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기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직시할 때에 우리는 마치 양파 껍데기를 벗기듯이 좀 벗겨서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도 직시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깊이 숨겨진 죄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시편 38편 3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1절).  그럼 다윗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징계는 무엇입니까? 저는 한 여섯 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 우리 각자의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나를 심히 누르시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38편 2절을 보십시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여기서 ‘누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시편 32편 4절에도 나와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나를 심히 누르”신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환난 같은 것을 통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3절).  아마도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라는 말씀(38:2)도 화살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양심을 찌르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라 생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고통입니다.

성경 시편 38편 3절과 7절을 보십시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이 두 구절을 보면 다윗은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다’고 두 번이나 반복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죄로 인한 주님의 진노가 임했기 때문입니다(1, 3절). 그 주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다윗에게 육신의 고통이 임하되 그의 뼈에 평안함이 없었습니다(3절). 여기서 다윗의 뼈에 평안함이 없었다는 말은 고통의 극단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왜 우리는 다윗처럼 이러한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다윗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육신의 고통이라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 징계는 참 “무거운 짐” 같습니다(4절).  다윗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인 육신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10절).  여기서 “내 심장이 뛰고”란 말씀은 유쾌한 신앙의 심정이 아니고, 안정하지 못한 당황한 마음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죄를 범한 마음이 어떻게 유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마음은 안정 못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죄로 인하여 당황하는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라는 말씀(10절)은 다윗이 육신적으로 받은 징계 때문에 심한 고초를 당하여 눈이 어두워진 사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셋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상처슬픔입니다.

    

성경 시편 38편 5-6절을 보십시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요즘 아내하고 대화하면서 느끼는 것은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데 우리가 우리의 죄악 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순간에도 기뻐할 수 없고 오히려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슬픔과 더불어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처”란 마음의 상처보다 육신의 상처를 말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육신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 올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지 오래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가 있습니다(박윤선).  장기간 동안 상처 가운데서 슬퍼한다는 것을 상상해 볼 때에 죄의 결과란 무서운 것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비애는, 이 세상의 어떤 불행한 조건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의 죄과로 인한 자기 책벌의 비애이다.”  “자기 책벌의 비애”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참으로 우리에게는 유익한 비해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유익한 눈물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마음의 불안입니다.

    

성경 시편 37편 8절을 보십시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심음하나이다.”  우리는 죄를 짓고 나서 그 죄로 인하여 심령의 불안을 느낍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심령의 불안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에 그 죄로 인하여 마음으로 아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므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고 영혼도 상하게 되면 결국은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도 하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말씀은 시편 6편3절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에 ‘영혼이 심히 떨리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고통을 장기적으로 경험할 때에 오는 결과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지 인간의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오는 마음의 증상(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에서 우리는 신음 혹은 탄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에스겔 21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소문을 인함”입니다(7절). 그 소문이란 재앙을 가리킵니다.  그 재앙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하리라”입니다(7절).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여 마음이 불안하기에 신음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시38:8).               

 

다섯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환경적으로 고독해지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 38편 11절을 보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입니다.  육신의 고통과 상처 및 슬픔, 마음의 불안 등으로 마음의 짓눌림도 참으로 괴롭고 힘들겠지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사람들까지도 우리를 외면하고 멀리할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왠지 욥이 생각납니다.  육신의 고통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더 나아가서 그의 아내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라고 했을 때 욥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일 가까운 한 몸인 아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어리석은 말이나 하고 …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고립시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힘, 또한 의지하는 친구들이나 친척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징계하시되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친척들까지도 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원수들로 하여금 나를 공격하게 허락하십니다.

 

     성경 시편 38편 12절을 보십시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오나.” 이것은 다윗의 원수들의 행동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올무와 괴악한 말과 귀계를 써 가면서 다윗을 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올무”는 간교하게 다윗을 해하려고 꾸민 음모의 행위이고, “괴악한 말”은 다윗을 멸망시킬 일에 대하여 말함이고, “궤계”는 다윗을 속이려고 간특한 심사를 말합니다(박윤선).  성경 로마서 1장 24절, 26절, 그리고 28절을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는 다름 아닌 ‘내어 버려두셨다’(gave them over)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1:24);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1:26);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1:2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 된 선택을 할 때에 죄악 된 선택의 결과로 그냥 우리가 선택한대로 그렇게 내어 버려두십니다.  그 내어 버려두심 중에 하나는 바로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에 보호해 주시지 않고 그냥 내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이러한 징계들을 받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8편 9절을 보십시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춰지지 아니하나이다.”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리되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허리에는 창으로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내면의 고통,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자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진노를 독생자 예수님께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공격하여 상처를 입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신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추수 감사절 지난 다음 날 목양 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