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악인 Vs. 의인

 

 

[시편 3712-22]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이 여섯 가지 감옥들 중에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많은 성도들이 여섯 번째 감옥인 “질투의 감옥” 생활을 종종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편 기자 아삽이 시편 73편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우리 많은 성도들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질투할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3절). 그러기에 오늘 본문 시편 37편의 저자 다윗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envious)하지 말지어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 믿는 자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질투의 감옥에 넣으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우리 믿는 자들을 잡아먹으려고 그의 종들인 악인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핍박하며 죄에 빠지게 하며 믿음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시편 37편 12-22절에도 사탄은 그의 종들인 악인들을 통하여 의인인  다윗을 해하려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악인 Vs. 의인”이라는 제목 아래 악인과 의인에 대해서 좀 생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악인은 주님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성경 시편 37편 2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주님의 저주를 받은 악인은 의인을 해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악인은 의인을 해하려고 합니까?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악인은 분노 중에 의인을 치기를 꾀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2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시편 기자 다윗은 이 악인들을 “악한 꾀를 이루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7절).  악인들의 꾀 중에 하나는 “꾸고 갚지 아니”하는 것입니다(21절). 항상 많은 재산도 부족하게 여겨 탐심과 욕심 가운데서 남의 것을 꾸고도 돌려주지 않는 가운데 악인들은 풍성할 수가 있습니다(16절). 의인(성도)을 쳐서라도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는 악인들입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악인들의 이를 가는 모습을(7, 12절) 우리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을 향한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7:54).  악인이 의인의 설교를 듣고 마음(양심)에 찔려서 의인을 향하여 분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결국 행악에 치우칩니다(시37:8). 

 

(2) 악인은 의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4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악인은 의인을 치기를 꾀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칼”이나 “활”같은 자기의 무기들로 의인을 죽이려고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살기가 등등한 악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의인의 모습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이러한 의인의 모습은 인간 중에서도 도움을 받을 데 없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악인들의 모습과 대조적입니까?  연약하게 보이고 힘이 없고 도움 받을 데 없는 의인의 모습 …  살기등등한 악인들에게는 좋은 먹이입니다.  이러한 악인과 의인의 대조적인 모습은 사도행전 9장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사울(1절)이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의인들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다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하였습니다(2절).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행악하는 악인들을 접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슬퍼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웃으시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주님께서 웃으시는 모습은 시편 2편 4절에도 나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메시야를 대적할 때에(2절) 하나님은 웃으시며 저희를 비웃으십니다(4절).  그러기에 우리도 악인들이 우리를 치려고 꾀할지라도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악인들을 향한 주님의 심판(멸망)의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웃으시는데 성도가 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사실 앞에서 성도가 우는 일은 종종 있으니, 그것은 성도 자신이 어두워진 까닭입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영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웃으심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비애 중에서도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가 있습니다(칼빈).  왜 우리가 악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기쁨의 참예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37:15).  악인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최후의 발악을 할 때에 바로 그 때가 그들의 멸망하는 때입니다(박윤선).  오늘 본문 시편 37편 20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기름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처럼 악인의 멸망은 확실한 전멸이요 순식간이 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저주를 받은 악인들은 끊어집니다(22절, 참고: 9-10절).

                                                                                      

의인은 주님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성경 37편 22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  의인이 받는 주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한 2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의인이 받는 주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7절 보십시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이 구절은 16절 말씀인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의 이유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박윤선).  즉, “악인의 팔”, 악인이 믿던 힘, 즉 물질의 풍부함은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소유는 작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계시니 의인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인의 적은 소유가 오히려 그에게 복이 됩니까?  그 이유를 두 가지입니다(박윤선): (a) 첫째로, 의인의 사소한 소유라도,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인 만큼, 그것이 부족해지면 그가 또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의인에게 복인 것입니다.  (b) 둘째로, 의인의 적은 소유는 불의하게 얻는 것이 아닌 고로, 유쾌하고 행복 된 생활을 가져오기 때문에 의인에게 복입니다.  이 외에 또 다른 복은 적은 소유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질의 큰 복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작은 영적의 복이 될 수 있는데 물질의 작은 소유는 우리에게 큰 영적인 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박윤선 박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정한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고(눅12:15) 의를 소유함에 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칭함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의를 소유함이 물질의 풍부함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2) 의인이 받는 주님의 축복은 우리의 기업이 영원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37편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여기서 “완전한 자”란 전혀 무죄한 자를 가리키지 않고, 순전한 자, 곧, 하나님 앞에서 신앙 양심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순전한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힘쓰는 자의 “날”, 곧, 그의 평생을 알고 계십니다(박윤선).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시는 대상된 자의 기업, 곧, 그가 살며 즐기게 하는 소유물은 영원히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자시며 보호자시니, 그의 기업이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박윤선).  곧 의인의 기업은 환난 때에도 실패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19절). 그러므로 의인은 기근 때에도 하나님의 족한 은혜로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21절하). 의인은 적은 소유를 가지고 검소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하면서도 넉넉한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결국 악인은 그처럼 부하여도 멸망으로 향하여 가고, 의인은 흩어 구제하여도 땅을 차지하며 그 자손들도 형통합니다(박윤선).

 

   주님의 저주를 받은 악인들은 우리를 치려고 꾀하고 최후의 발악으로 죽이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웃으시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악인은 분명히 순식간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슬픔 중에라도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 영혼에게 외치십시다.  ‘나는 주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믿음으로 외치십시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에 비해 작다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믿는 힘인 물질의 풍부함을 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의인의 소유가 작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에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입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복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환난 때에든 기근 때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족한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복 받은 자,

 

 

제임스 목사 나눔

(하나님의 웃으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