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나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시편 3517-28]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형통”이란 히브리어로 흔히 '싸칼'과 '짜라흐'로 표현합니다. '사칼'은, 번창하고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짜라흐'는 번성하고 풍부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솰라'라는 말도 많이 쓰이는데, 그 뜻은 “안전하다,” “번창하다,”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샬롬', 즉 안녕, 평안, 행복이라는 말이 나왔고, 히브리인들은 이 말로 인사를 나눕니다.  따라서 형통이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면을 말할 뿐만 아니라, 내적이며, 심적이며, 영적인 면까지 포함하여 말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근데 왠지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형통”이란 고생과 역경도 없는 그저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 고난도 없고 역경도 없이 번창하고 성공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만사형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만사형통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자세도 틀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사형통이란 이 땅에서는 있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어느 웹 사이트에서 이러한 글을 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직선보다는 굴곡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인터넷).  맞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는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롤로코스터 타는 것처럼 굴곡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타는 롤로코스터도 없는 기차 같은 것을 타면 재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인생의 여정에 굴곡이 있어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하므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굴곡을 경험한 두 사람을 예로 들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참된 성경적 형통 관을 배우게 됩니다.  요셉을 통해서 배우는 형통관은 고난이 없이 무조건 모든 게 잘되는 것이 형통이라기보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이한 사실입니다(창39:2, 3, 23).  진정한 형통이란 고난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또한 풍족하고 궁핍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둘째 예는, 신약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안식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아갔다가(13절) 루디아란 여자를 만나 결국에는 그녀와 그녀의 집이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15절). 그리고 그는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16절) 귀신 들린 여종이 치유 받은 후 핍박 속에서 결국에는 감옥에 가서 기도하게 됩니다(25절).  그리고 그는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감옥 문을 열렸고 간수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34절).  바울의 삶 속에는 이렇게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도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예를 통하여 저는 “형통”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때에 형통이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35편 27절을 보면 성경은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나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형통케 하시는지 한 2가지 단계로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하심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관망 단계입니다.

 

성경 시편 35편 17절을 보십시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시편 기자 다윗은 지금 원수들로 말미암아 고통 중에 있는 가운데서 주님께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도 고통이 너무나 오래가면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어느 때까지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가’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한탄 가운데서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께서 어느 때까지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시편 13편 1-2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라는 한탄의 기도는 고통 가운데서 다윗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왜 하나님께서 관망만하고 계신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망 단계”를 다른 말로 한다면 “잠잠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다윗은 왜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는지, 주님께서 왜 자기를 멀리하시는지 분명히 주님께서 다윗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다 보고 계심을 알고 있는데 왜 잠잠히 계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저 관망하시는 것 같고 잠잠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영적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는 것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영적 유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의 단련’과 “인내와 연단입니다(박윤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잠잠하고 계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그를 의지케 하십니다(시28:1, 7).  성경 이사야 30장 15절을 보면 “…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에서 다윗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시편 35편 19-21절을 보십시오: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다윗의 기도제목은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자기가 잘못되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시지 않고 계심에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길 간구하였습니다.  또 다른 영적 유익은 우리는 고통의 터널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게 되고 또한 인내를 통해서 연단, 즉 우리의 인격이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인격이 빚어집니다.  성경 시편 119편 71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배우므로 말미암아 그 계명 순종함을 통하여 더욱더 우리의 인격이 빚어져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송원준이란 분의 “잠잠하신 하나님”이란 글을 보면 침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궁정에서 끌어내시고, 미디안 광야에 그를 살게 하신 사십년 동안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십칠 세의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 부으신 후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세계를 교구삼아 선교했던 바울의 눈물의 기도, 즉 몸의 가시가 된 병을 고쳐달라는 애원의 기도에 대해 침묵하셨다.  끝내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거절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잔을 옮겨 주소서’라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에 잠잠하셨다. …  헨리 나우엔은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의 활발한 임재와 같다고 선언했다.  … 시편기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잠잠하신 하나님이 지금 야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열심히 역사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나의 마음을 단련시키신다.  … 하나님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기도하게 하신다”(인터넷).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수동적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능동적인 마르다보다 수동적이 마리아가 돼야겠다는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수동적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능동적으로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잠잠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더욱더 큰 능동적인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케 하심에 있어서 두 번째 단계는 떨치고 깨시는 단계입니다.

 

성경 시편 35편 23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나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의 곤고한 처지를 다 보고 계시면서도 잠잠히 계실 때에(22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떨치고 깨셔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23절).  여기서 “떨치고”란 말은 “용기를 분발하시라는 뜻이고,” “깨셔서”란 말은, “자는 듯한 상태에서 일어나셔서 심판해 주시기를 원하는 말”입니다(박윤선).  과연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은 깨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성경 시편 121편3-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는 듯한 상태에서 일어나셔서 자기의 원수들을 주님의 공의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로 심판하시므로 말미암아 그의 원수들이 자기가 패망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소원 성취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24-25절).  더 나아가서, 그는 원수들이 실패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관망하지 마시고 떨치고 깨셔서 자신의 원수들을 낭패케 하시길 간구하였습니다: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26절).  또한 다윗의 기도는 자기와 같은 성도들이 찬송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27절).  이 간구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할 때 다윗은 그와 같은 성도들, 즉 다윗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27절)]과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직선보다 굴곡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은 그 곳에서 주님은 자신의 깊은 뜻을 보여주십니다.  왜 “나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그냥 관망만하시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 그가 침묵 속에서 열심히 또한 능동적으로 역사하시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기도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까?  인내 훈련 및 인격 빚어짐의 축복을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떨치고 깨셔서 공의로 심판하시사 우리의 원수들을 실패케 하시며 멸망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십니다: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18절). 

 

 

 

“나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역사를 수동적인 기도 자세로 경험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굴곡의 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로 세움을 받는 과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