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

 

 

[시편 359-16]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쇠망치를 들고 때릴 때 크리스천들은 그 철받침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쇠망치”는 다양합니다.  모욕도 될 수 있고 핍박과 환난, 비방과 악담 등등, 사탄은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 성도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여러 종류의 “쇠망치”로 우리를 내리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 시편 35편 9-16절에 사탄의 자녀들에게 여러 종류의 ‘쇠망치’로 맞는 다윗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9절).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고백은 다윗이 이미 구원을 받은 후에 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의 원수들에게 환난과 핍박을 받은 상황에서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믿음 가운데 이러한 확신 있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여기서 다윗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고백하면서 구원의 하나님, 즉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시편 35편 9-16절 말씀 중심으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로 부터 건져주시는지 한 4가지로 묵상해 보며 우리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다윗처럼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9절).

 

첫째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힐문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5편 11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불의한 증인”이란 “무죄한 다윗에게 죄를 씌우는 거짓 증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거짓 증인들은 무죄한 다윗에게 와서 다윗이 알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죄를 씌우려고 힐난하였습니다(박윤선).  왜 불의한 증인들은 다윗에게 죄를 씌우려고 힐난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불의한 증인들은 “무고히”(2x)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7절). 

 

사탄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무고히 해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우리에게 죄를 씌우려고 힐난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로 하여금 죄 중심적 삶을 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에 이끌림을 받게 만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증인들의 힐문에 휘말려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 마음에 드는 생각들 중 불의한 증인들의 힐문과 같은 생각들에 지배를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불의한 증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자꾸만 우리 인간의 공로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자꾸만 우리의 행함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죄책감에 시달려 참된 믿음의 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힐문”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저는 사도행전 4장 14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병 나은 사람과 함께 썼을 때에 그것을 보고 그들의 대적들은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납니다.  왜 힐난할 말이 없었습니까?  그 이유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걷게 된 기적의 확실한 증거가 바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있었기에 그들의 대적들은 힐난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탄의 불의한 증인들에게 힐문할 것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면 어떻게 불의한 증인들이 힐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다윗처럼 불의한 증인들에게 힐문할 것들을 제공할 때에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책감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무고한 죽음을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므로 구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없다함을 받은 진리(사실)로 하여금 우리를 죄책감이라는 감정에서 건지십니다.

 

  둘째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을 외롭게 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5편 12절을 보십시오: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놀라운 사실은 시편 기자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들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다윗이 그의 원수들에게 행하였던 선은 무엇 이였습니까? 

 

(1)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 13절을 보십시오: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금식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하였지만 그의 원수들은 너무 악하여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슬퍼하는 은인인 다윗을 배척하였습니다(박윤선). 

 

(2) 다윗은 그의 원수들을 염려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 같이 하였도다.”  여기서 ‘굽히고 슬퍼함’이란 무거운 비애를 가리킵니다.  즉,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질병 때문에 염려하였습니다(박윤선).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10).  즉, 우리 성도의 책임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대상이 다윗처럼 우리들의 원수들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는 그의 원수들은  보통 종류의 악이 아닙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좋게 하는 자를 해하는 자야 말로 양심과 인도가 없는 자니, 무가내하한 자요 하나님의 원수요 성도의 원수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우리의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며 그들의 질병이나 환난을 당할 때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선을 베푸는데 상대방에서는 오히려 악으로 갚는 경우가 있을 때에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낙심 속에서 ‘왜 이런 일을 내가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참고 견디면서 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지 충분히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 속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우리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오직 주님만이 알아주시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외로움에 빠질 때에 주님의 건지심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25:16).

 

셋째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환난을 기뻐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5편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의 고난을 볼 때에 기뻐서 모여 축하하며 더욱 그를 해롭게 하려고 회의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극도로 악한 증거입니다(박윤선).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기뻐하는 자들, 우리를 위로하고 돕기보다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여 모여서 서로 수군수군하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다윗은 그러한 자들의 모임을 알았고 그 모임에 “비류”, 즉 “백성들 중에도 가장 낮은 자들”까지도 그 모임에 합류하여 다윗의 환난을 기뻐하였습니다(욥19:18, 30:1 참조)(박윤선).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 사탄의 자녀들은 서로간의 원수지간 이였다 가도 친구가 되고 (예: 헤롯과 빌라도) 또한 지위를 막론하고 낮은 자들이건 높은 자들이건 하나로 뭉칩니다.  오늘 성경 시편 35편 15절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다윗도 모르는 비류, 즉 백성들 중에 가장 낮은 자들까지도 연락되어 다윗의 원수들과 합류하여 다윗의 환난을 기뻐하여 축하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미 오늘 본문 11절에서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라는 문구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왠지 다윗의 원수들이나 우리 성도의 원수들은 우리도 모르는 일로 힐문하고 또한 우리도 모르는 사람들로도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도 모르는 일로도 우리를 힐문하여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은 우리가 환난 당할 때에 함께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얻는 교훈은 우리의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의 구원을 기뻐하지만(9절)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의 환난을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15절).  서로의 기쁨의 이유(근거)가 이렇게도 다른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다들 모여서 기뻐하여 비방과 악담으로 우리의 인격을 찢는 듯 조롱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그의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9절).

 

마지막 넷째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하여 이를 가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5편 16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의 원수들은 연회 석상에서도 자기들의 은인인 다윗을 한 개의 조롱거리로 관설하며, 언제든지 해하려고 이를 갈았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연회는 원수 되었던 것도 풀어버리는 좌석인데, 거기서도 그 은인을 질시하고 해하려 함은, 극히 굳어진 불의한 심령입니다(박윤선). 

 

이러한 심령들이 우리 주위에서 항상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한 팀을 이루어 충분히 우리를 공격하여 우리를 해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 54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성령 충만 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스데반을 대적하던 자들은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59-60절).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그를 향하여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 건져주실 줄 믿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구원을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울면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과거의 구원의 은총을 되새기면서 지금 현재 우리 원수들이 우리를 “쇠망치”로 때리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겠다고 결심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기도, 기대, 기다리면서,

 

 

 

제임스 목사 나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