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시편 3415-22]

 

 

여러분은 고난이라 가벼울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신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김남중 목사님의 밑에 글을 읽으면서 고난이 어떻게 가벼울 수가 있는지 그 해답을 좀 얻습니다:

 

       “세상의 죄의 깊이는 의인의 고난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세상의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가 있다.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벌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느낌이요, 직관이요, 신념이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은 악에 물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멸망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악한데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죄 값을 대신 치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인들의 고난의 의미다.  의인의 고난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그 값을 치르는 것이다. 의인이 그런 것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는 속죄

제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의인은 세상을 살린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그런데 그가 원치 않는 고난이 세상을 살린다”(김남중).   

 

우리의 고난이 가벼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고난 중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고난 중에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시고자 고난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죄 값을 대신 치를 때에 우리의 고난은 가벼울 수가 있습니다.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고난은 나의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결과이고 둘째 고난은 나의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입니다. 이 주님에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빌1:29). 이러한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자는 자에게는 고난이란 가벼운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는 고난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의 은혜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34편 15-22절을 보면 우리는 이 고난의 은혜를 누리는 시편 기자 다윗을 봅니다.  그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9절).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는 제목 아래 의인이 고난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의인이 고난 중에 만나는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34편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기자 다윗이 고난 중에 만났던 하나님은 바로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이였습니다.  왜 다윗은 마음이 상했었습니까? 왜 그는 중심에 통회하였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고난 받는 중에 “미친 체”한 것이 죄인지, 즉 거짓말을 하였기에 아니면 고난 중에 악을 버리지 못하고 입술로 죄를 범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13-14절).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의인 다윗은 많은 고난 가운데서 마음이 상하였다는 사실입니다(18절).  그는 많은 고난 중에 중심이 통회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입니다.  성경 시편 51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우리의 마음은 좀 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좀 부서져야 합니다. 마치 묵을 땅을 기경하듯이 강퍅하고 단단한 우리 마음은 좀 부서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통해서이던지 아니면 그의 징계를 통해서이던지(예를 들어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좀 상할 (부서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혹은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숨기고 자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더 이상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심에 찔림과 마음에 부서짐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57장 15절을 보면 통회하는 자의 마음과 겸손한 자의 영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즉, 겸손한 자는 통회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한 자, 즉 마음이 상한 자 또는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시사 그 마음을 소성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통회하는 마음을 소성케 하실 뿐만 아니라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47:3). 복음성가 “마음이 상한 자에게”란 곡을 보면 오늘 고난 중에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사와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적용해야 할 교훈을 줍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주는 가까이 하시고  진실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의 위로가 그를 감싸 주리라  사랑의 주님은 교만을 물리치고 애통하는 자를 찾나니 누가 주님을 위해 누가 이웃을 위해 그 고난의 잔을 나눌건가요 무엇이 그렇게 좋아 웃고 있나요 주님은 잃은 자 위해 울고 있는데.”

 

       둘째로, 의인이 고난 중에 만나는 하나님은 의인의 부르짖을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 시편 34편 15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성경 출애굽기 3장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모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 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분명히 이스라엘 하나님 또는 우리의 하나님은 의인의 고난을 보시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다윗은 시편 34편4절과 6절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곧 우리가 곤고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 시편 34편에서 기도에 대하여 4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4, 6, 15, 17절)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많은 고난 가운데 많은 혹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많은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기도 또는 더욱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시34:15).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셔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이신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시는 기도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 들으시는데 응답하지 않으시는 기도가 있으십니다.  그것은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려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 진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마음이 상하지 아니하고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회개기도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먼저 우리의 죄를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한 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바라므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실 것입니다.

 

        셋째로, 의인이 고난 중에 만나는 하나님은 의인을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 시편 34편 17절, 19절, 22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한 후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여 건져 달라고 간구할 때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사 우리를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은 확실하며 또한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간구할 때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절).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6절).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17절), 비록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19절).  한 마디로, 우리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 즉 그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에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0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마음이 상한 자를 구하시되 그를 구함에 있어서 악인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을 멸망시키시므로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6절).  하나님은 의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그의 거룩하심 앞에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악자의 자취를 이 세상에서 끊으십니다.  결국 악인들은 그들의 악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21절).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의인을 확실하게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20절).  우리를 환난 중에 돌아보시는 하나님, 결국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그 고난 가운데서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요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요 또한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의인은 그 고난이 가볍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신 걸머지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마음이 상하셨던 예수님을 멀리하셨던 하나님, 더 나아가서 마음이 상하셨던 예수님을 버리셨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마음이 상하셨던 예수님을 버리셨고 그의 십자가상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므로 구원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사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고난과 환난과 두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므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고 계십니다(시34:10; 엡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시34:1-3).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고난 중에 있는 지체들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