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하나님이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시편 30]

 

 

이번에 저희 교회 장로님께서 허리를 다치셔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보았기에 장로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양말 신기도 힘들 정도로 허리를 다치신 장로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생도 태어나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양육 받다가 나중 노년에도 몸을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또 다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우리 인간인 것 같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무도 나를 도울 자가 없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시편 22장 11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환난에 처해있는 다윗은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처럼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을 때에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우리는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되새겨야 합니다(4-5절). 마지막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합니다(9-10절).

 

오늘 성경 시편 30편 10절을 보면 “…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도울 자가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므로 그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시는지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끌어내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다윗은 주님을 높이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주님을 찬송함과 봉사함과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함으로 입니다(박윤선). 그러면 왜 다윗은 이렇게 주님을 높이려고 결심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다윗을 그의 대적의 손에서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3절).  여기서 “끌어내사”란 말은 아라비아어는 “딸라”로서 이 아라비아어는 “두레박줄을 쳐들어 올림에 대하여 쓰는 말” 입니다.  이 어귀는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리듯 사지에 빠진 인생을 끌어 올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합니다(박윤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마치 우물 안에 점점 깊이 빠져서 더 이상 우리 인간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력한 상태에 있어서 구원자이신 주님께 베드로처럼 손을 내밀어 ‘주님,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할 때 우리 주님은 오셔서 마치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리듯 우리를 건져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디에서 끌어내어 건지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다윗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살리셨습니다(3절).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거의 죽을 뻔한 상황, 즉 사망하여 매장되는 듯한 극난한 처지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구출해 주셨습니다(박윤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대적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사탄과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대적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죄를 짓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악 된 기쁨을 누리길 원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나 다윗은 경험과 더불어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다윗을 그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시사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기뻐할 일이 생기지 못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대적들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지에 빠졌을 때에 우리를 마치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리듯이 우리를 그 사지에서 끌어내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우리들은 다윗처럼 마땅히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며 그를 섬기며 모든 것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 카다린은, 주님 앞에서 자기의 의지를 없는 것과 같이 하여 순종하므로 주님을 높이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박윤선).  우리도 성 카다린처럼 주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다윗은 대적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시사 그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고치셨다’는 말씀은 일시 실패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회복됨을 말합니다(박윤선). 만일 그렇다면 다윗이 범한 이 “일시 실패”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형통할 때에” 스스로 자신에게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말할 정도로의 교만함입니다(6-7절).  결국 이 범죄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얼굴을 다윗에게 가리우셨고 그로 인하여 다윗은 근심하였습니다(7절).  이 얼마나 귀한 근심입니까? 이 근심은 세상적 근심이 아니라 바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 가운데서 다윗은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2, 8절).   그의 기도 제목은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였습니다(10절).  여기서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란 기도 제목은 범죄 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구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그 기도 결과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도움을 받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아니 다윗보다 더 실패를 많이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볼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처럼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한 회개(repentance)가 없이는 진정한 회복(reconciliation)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회복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의 거룩한 사랑으로 사랑의 매를 맞고 회개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회복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5절을 보십시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 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건지심(구원)을 받고 치유함을 받은 후 깨달은 진리는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사실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난처한 자리에 빠져 고생한 것보다, 거기서 건짐이 되어 누리게 된 기쁨의 분량은 더욱 많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의 본능은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을 더 잘 기억합니다.  마치 장미의 냄새는 기억치 못하나 그 가시에 찔린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박윤선).  그러나 하나님의 노염은 잠간이래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은 잠간이고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입니다(5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받는 고통 중에서 저녁에는 울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새 하루 새 아침에는 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J.I. Packer의 “하나님의 계획”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마음은 “…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빌1:18).  어떠한 상황에 제 자신이 처해있을 찌라도 성령님께서는 제가 제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면서 결심하게 만드셨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자!’ 우리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잠깐의 눈물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눈물과 슬픔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 큰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을 달게 받을 때에, 그것 자체도 맛을 변하여 우리에게 복이 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고통의 맛은 한약처럼 입술에 달 때는 쓸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혼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결국 우리 또한 다윗처럼 이러한 고백을 하길 원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11).

 

넷째로,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6-7절을 보십시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시가 그를 도와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을 굳게 세우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견고케 하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 개개인을, 우리의 가정을 또한 그의 피로 사신 교회를 견고케 세우시사 요동치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자만심과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국을 견고케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만심이 생겨서 자기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6절, 박윤선).  결국 하나님께서는 교만해진 다윗을 향하여 진노하신고로, 다윗은 회개하면서 근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을 때에 회개하는 자는 쉽지 못합니다(박윤선).  그러나 다윗은 그런 때에 귀하게 회개하였습니다(시51:4 참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주의 은혜로”라는 사실입니다(30:7).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견고케 세우시므로 요동치 않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겸손해서, 선한 일을 해서 등등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찬송케 하십니다.

 

성경 시편 30편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결국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케 하십니다.  우리를 환난에서 끌어내시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도록 견고케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는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또한 그 기도 응답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어찌 죽은 자가 찬송할 수가 있으며 복음(진리)을 전파할 수가 있겠는지 하나님 앞에서 말하였던 다윗(9절),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대적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을 경험하였습니다(5절). 그러므로 그는 영영히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서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의 도우심을 받는 우리는 그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자들로서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놀라운 사실은 나의 돕는 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의 진노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그의 기도 소리인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들으시고도 기도 응답을 하지 않으시사 예수님을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시는 것을 보시고서도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러셨습니까? 그 이유는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던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고쳐)주시고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버려두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신적 기쁨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견고케 세우시고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찬양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돕는 자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의 도움을 받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