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을 바랄지어다!’

 

 

[시편 277-14]

 

스토미 오마샨이란 사람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란 글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기 원합니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그를 바라며 기다리기보다 행동으로 먼저 옮기기를 더 속히 합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더 이상 참고 견디며 기다릴 수 없을 때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곤 합니다.  이에 대해 스토미 오마샨이란 사람은 ‘기다림의 때’를 하나님을 섬기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이렇게 한번 해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참고 견딘다고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훨씬 견디기 쉽습니다”(인터넷). 

 

오늘 성경 시편 27편 14절을 보면 다윗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바랄지어다”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영혼아 기다릴지어다’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바랄지어다”란 단어는 “기다릴지어다”라는 말씀임).  다윗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성도가 역경을 당면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4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당면한 역경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기하여 인간으로서는 알기 어려우니 공손히 그의 발밑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3)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 역경을 해결해 주실 터이니 기도하는 태도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4) 어떤 때에 성도는 일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유리하기 때문에 주님께 맡기고 기다림이 좋습니다.  저는 오늘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을 바랄 찌어다!’(Wait for the Lord, O My Soul!)라는 제목 아래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무엇을 바라는지 한 세 가지로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주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성경 시편 27편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왜 다윗은 주님의 긍휼을 바랬습니까?  저 같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므로 그의 대적과 원수 된 행악 자들(2절)을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시길 간구할 텐데 왜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다윗은 주님께서 노하사 자기를 버리실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9절). 이것은 다윗이 사울처럼 버림당함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럼 왜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도 사울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삼상15:23).  사울 왕은 아말렉을 쳐서 전멸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사무엘을 통하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3절).  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사울 왕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작게 여겼지만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울 정도로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12절).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16:7) 사울 왕의 중심은 교만하였기에 그 교만함 가운데서 나온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사울처럼 교만하여 그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다윗은 충분히 사람들을 두려워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처해 있었던 상황은 그의 대적과 원수 된 행악 자들(2절)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환난”(5절)가운데 있었고 또한 군대가 그를 대적하여 진 치는 전쟁 상황에 처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3절) 다윗은 그들을 두려워하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여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던 다윗, 그는 마음 중심에 교만의 싹이 자라나서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이렇게 우리 자신의 마음 중심에 교만의 싹이 자라나서 하나님께 버림받을 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울처럼 교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불순종의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기다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짖어야 합니다(7절).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길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주님의 얼굴을 바랍니다.

 

성경 시편 27절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여기서 주님의 얼굴을 바란다는 말씀은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얼굴)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박윤선).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봐 두려워했던 다윗이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얼굴)을 바랐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마음으로 범죄 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다 마치고 집에 가서 식사한 후 아내에게 제 마음의 생각을 나눴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란 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조그만 잘못된 습관조차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조그만 잘못된 습관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고칠 수가 없다면 하물며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교만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생각되었습니다.  다윗은 오늘 성경 시편 27편 9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주님의 얼굴을 바랬던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10절). 그는 마음 중심으로 교만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봐 두려워했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볼 수 없음을 두려워했습니다.  마치 아기가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길 원하여 간구하였습니다.  그러한 기도 가운데서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내가 …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13절).  이 얼마나 귀한 확신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에게 그 얼굴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그의 은혜로운 모습을 사모하였던 다윗은 주님의 은혜 볼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마음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범죄할까봐 두려워했던 다윗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얼굴을 오히려 더욱더 사모하므로 말미암아(8절) 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채우고자 기도하며 또한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교만함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다윗처럼 우리 마음은 주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마음 중심으로 사모하여 찾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흘러내릴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주님의 길을 바랍니다.

 

성경 시편 27절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했던 다윗은 주님의 은혜로운 모습을 구하면서 주님의 은혜 볼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배워 그 길을 걷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길”은 ‘의로운 길’을 가리킵니다(박윤선).  다윗은 불의를 행하는 악한 대적 자들의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의 힘입어 사울 왕처럼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의로운 길을 걷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하였는데 이 기도는 다윗이 옳은 길을 가는 중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구하는 기도입니다(박윤선).  다윗의 대적들과 원수 된 행악 자들이 다윗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걷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있었기에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옳은 길을 신실하게 걷을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면서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우리는 다윗이 처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 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다윗의 원수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하며 그에게 대하여 위증과 악담을 토하는, 즉 다윗을 해하려고 독심을 품고 독설을 가지고 악독한 언사를 일삼는 상황에서(박윤선)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주님의 길, 의로운 길을 걷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걷기를 원했던 주님의 길이 평탄한 길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생각이 든 이유는 다윗의 환경과 처해있는 상황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적들과 행악 자들, 위증 자들을 악을 토하는 자들의 핍박 가운데 있는 다윗이 걷고 있었고 또한 바라던 주님의 길이 어떻게 평탄한 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게 되면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닐지라도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주님의 길을 걸을 때에는 주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으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평탄을 길을 내십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 바다에서 길이 다 막혀보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거절하는 원망의 죄를 범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평탄의 길을 내시므로 말미암아 결국 홍해 바다 또한 하나님께서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육지같이 걸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다윗처럼 이런 저런 역경과 환난 같은 상황에 처해서 전혀 우리 인간의 눈으로 평탄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의 긍휼과 얼굴과 길을 찾는 자에게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그러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서도 홍해 바다가 갈라져 길을 내시듯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우리 주님은 평탄의 길을 내시사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며 기다리고 계십니까?  다윗처럼 어떠한 역경과 위험한 상황에 쳐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모습과 주님의 길을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으신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길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신실하게 걷고 있는지요? 찬송가 470장 1절에서 나오는 가사처럼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현재와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길을 순탄하게 하시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그의 은혜를 사모하므로 그의 도우심을 받아 신실하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케 하시사 주님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내 마음의 주님의 평탄한 길을 내시는 평강의 주님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