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주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시편 251-7]

 

 

저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란 저희 부부의 첫째 아기 주영(Charis)이에 대한 기억입니다. 1998년 4월 29일 주일, 저는 예배를 다 마친 후 주영이가 입원해 있는 엘에이 어린이 병원(Los Angeles Children)에 가서 담당 의사를 만났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의사 선생님에게 받았던 질문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의 아기를 빨리 죽겠하겠는가 아니면 천천히 죽게 하겠는가?’  의사 선생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저에게 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의사 선생님에게 아기를 천천히 죽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왜 제가 의사 선생님에게 아기를 천천히 죽게 해달라고 부탁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빠인 저의 욕심이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그 다음 날인 4월 30일 월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성경 시편 63편 3절 말씀을 묵상한 후 병원에 가서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 주영이를 빨리 죽게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날 저희 부모님과 형 부부와 여동생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영이를 제 품에 앉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영이는 제 품안에서 잠들었습니다. 오늘 따가 그 기억이 유난히도 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만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좋은 기억들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안 좋은 기억들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처 입은 기억들, 고통당한 기억들, 아픈 기억들 등등. 우리 모두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들, 그렇게도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상처 입은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꼭꼭 마음 깊은 속에 숨겨두고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보이거나 알리고 싶지 않은 이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자신에게서도 잊어진 듯 하겠지만 결국은 또 다른 고통스러운 일로 말미암아 다시금 생각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시금 그 기억들을 눌러서라도 잊으려고 애씁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헨리 나우웬이 그의 책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들과 직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의 상처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직면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자기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다면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우리 마음 깊은 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들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기억들을 직면하는 가운데 마음을 바꾸어 회개하지 않으므로 우리 자신의 성장과 성숙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만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믿지 못하면서는 하나님께도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죄악 된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함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치유의 과정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다시금 기억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기억들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연결할 때에 우리 안에 치유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시편 25편 6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다윗의 기도가 좀 의아한 기도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신 대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을까요? 왜 그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시길 간구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 자신이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의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그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죄(용서)해 주심을 사모하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자는 어떻게 하는지 한 4 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자는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성경 시편 25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다윗은 원수들과 속이는 자들(2, 3절)의 핍박을 받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주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여기서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내 영혼을 당신께로 쳐들었나이다”입니다(박윤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영혼을 쳐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혼은, 그 속에 깊이 들어있는 죄악 때문에, 땅에 낮게 붙은 듯이 침체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한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는 영혼, 땅에 낮게 붙은 듯이 침체 상태에 있는 영혼,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때에 역시 ‘나의 죄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로 쳐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쳐들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임을 고백한 후 바닷가에 던져집니다(욘1:12). 그리고 그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욘2장). 그 기도 가운데 요나서 2장4절을 보면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영혼은 이렇게 요나처럼 다시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한 영혼은 주님을 우러러 보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나의 영혼을 주님께 쳐들었다는 말은 다윗이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였음을 의미합니다(시25:2). 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에 가장 큰 방해는, 하나님 밖에 다른 것들로 도움 받을 줄 알고 마음이 이리저리 동요됨이다”(칼빈).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우리는 주님을 우러러 볼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이나 것들이 생각나가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내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의심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의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6).  그러면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주님을 바랍니다(시25:3).  여기서 주님을 바란다는 말씀은 주님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주님께 소망을 두고 참아 기다렸습니다(박윤선).

 

       둘째로,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자는 주님의 보호하심을 원합니다

 

성경 시편 25편 2-3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다윗은 원수들과 속이는 자들(2, 3절)의 핍박을 받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사 한 것은 “곧 실패하지 않게 하여 주심이니, 이는 보호하여 주심”입니다(박윤선).  다윗은 그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극도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돌아봐 주시길 다윗은 간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억울하게 한 자들을 자기 힘으로 이겨 보려고 어떤 복수 행동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도다운 태도입니다(박윤선).  이러한 성도다운 태도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원수를 내 힘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자세, 이러한 자는 원수에게 수치를 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수들 또는 “무고히 속이는 자”, 즉 “헛되이 속이는 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다(3절, 박윤선).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거짓말로 속이면서 우리를 곤고에 빠지게 할 때에 이런 저런 실패 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실패감이란 우리 마음 안에 의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가 되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보호해주시사 원수들의 거짓말(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자는 주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를 원합니다.

 

성경 시편 25편 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다윗의 원수들(2절), 즉 “무고히 속이는 자”(3절)인 비양심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속이는 자들이 진실 된 다윗을 넘어뜨리려고 거짓말을 만들어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도(진리)를 가르쳐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4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주의 도”, “주의 길”, 그리고 “주의 진리”란 다 같은 뜻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은 거짓말, 속임수를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혼동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의 종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혼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혼동하여 우리 뜻대로 행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 가운데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보여(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4절).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하늘에 계신 내(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하셨기에(reveal)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시25:4-5).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6:11).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야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25:5).

 

       마지막 넷째로,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는 자는 죄를 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 시편 25편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 자신의 젊었을 때의 죄들까지 회상하면서 하나님께 통회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핍박이나 곤란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말미암아 그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현재의 죄뿐만 아니라 과거의 우리가 젊었을 때 죄까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그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주시길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뤼궈룽의《한걸음 밖에서 바라보기》중에 이런 글이 있답니다 <고마운 일만 기억“이상하게도 남에게 섭섭했던 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데, 남에게 고마웠던 일은 슬그머니 잊혀지곤 합니다.  반대로 내가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줬던 일은 쉽사리 잊어버리곤 합니다. 타인에게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은 일은 기억하고, 타인에 대한 원망은 잊어버린다면 삶이 훨씬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고마운 일만 기억하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사십시다.   주님만을 우러러 보며 사십시다.  주님의 보호하심과 진리를 가르쳐 주심과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9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