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 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

 

 

 

[시편 1820-27]

 

 

요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저의 셋째 아이인 예은이의 모습 속에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이란 욕심 속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불공평합니다!’(God, It’s not fair!)라고 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제가 한번은 아이들에게 초콜랫 알을 열개씩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첫째 아이 딜런과 둘째 딸 예리는 한 알씩 조금 씩 아껴서 먹는 것 같은데 막내 딸 예은이는 그냥 먹고 싶은 데로 열 알을 다 먹고 나서 저에게 와서 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빠, 언니와 예은이 너에게 열 알을 공평하게 줬는데 왜 와서 또 달라고 하냐고 물으면서 안 된다고 말했더니 예은이가 하는 말 “It’s not fair!”(불공평하다)이였습니다.  그 때만 아니라 예은이는 요즘 자주 특히 언니와 비교하면서 왜 자기를 불공평하게 대하느냐는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희 부부가 아빠, 엄마로서 세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은이에게는 불공평하게 보였나 봅니다. 제가 세 아이들에게 똑같이 초콜랫 열 알씩 공평하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은이가 저에게 불공평하다고 말한 것을 생각할 때 저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그렇게 말은 하지 않을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치 예은이가 욕심으로 말미암아 더 먹고 싶어 하였지만 제가 주지 않으므로 불공평하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시지만 우리는 욕심 가운데 더 달라고 하나님께 땡강 부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요구한 것을 안 주시면 하나님께 불평하면서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족할 줄 모르는 자녀, 하나님 아버지 한 분으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 시편 18편 20절과 24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은 우리 하나님은 “나의 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상선벌악”에 분명하신 하나님이십니다(박윤선).  그는 자비한 자에게는 그의 자비하심을, 완전한 자에게는 그의 완전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며(25절), 깨끗한 자에게는 그의 깨끗하심을 보이시지만 사특한 자(패역한 자)에게는 벌하심으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6절).  그는 곤고한 자, 즉 겸손한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27절, 박윤선). 

 

그런데 우리는 좀 착각 속에서 균형 잃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격 중에서 그의 사랑하심, 은혜로우심, 자비하심, 선하심 등은 믿고 의지하면서 누리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에는 초점을 맞추고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좀 순종치 않고 살아도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말로서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이 가볍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 훼퍼가 말한 “싸구려 은혜”(cheap grace)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망각하면서 불순종의 죄를 거듭 범하면서도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사랑하심과 신실하심 등만을 우리 사욕 되로 해석하면서 그래도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누구보다 더 주님의 일에 수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5:10).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더욱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데 헌신하였습니다(21절).  그는 그저 싸구려 은혜를 외치며 신앙생활 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계시하는 계명을 순종하고자 전심전력한 자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책임인 의로운 삶을 살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가 동전 앞면이라면 동전 뒷면인 ‘나의 의’(my 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심각한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로서 의로운 삶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드려야 하는데 은혜로 칭함만 받았다는 것만을 강조하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로서의 의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열매를 맺으려고 전심전력하지도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했다고 자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의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처럼 말입니다. ‘무화가’이긴 한데 열매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균형 잃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칭의(의롭다하심)만에 초점을 맞추고 이어서 의로운 삶을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 이것은 균형 잃은 신앙생활입니다.

 

       다윗의 균형 있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더욱더 힘써 하나님의 도를 지켜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21절).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하여 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 교훈을 한 3가지로 나눈다면,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사모해야 하며 둘째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하며,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에 따르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하는데 그 것을 차단하고자 사탄은 계속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노력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말씀 가뭄의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아모스 8장 11절 예언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는 영적 가뭄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속에서 매 주일 마다 예배당 안에는 수 없이 많은 영적 귀머거리들과 영적 장님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임하시는 것조차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홍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 주일 예배당에 나와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들조차도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마치 귀머거리들끼리 서로 대화하듯 매 주일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이없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 1장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그가 싫어하시는 일들이 예배당 안에서 매 주일 행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탄은 성공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바른 교훈, 즉 진리를 떠나게 하고자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하였고 또한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하고 있습니다(딤후4:3-4).  사탄은 지금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그의 계명 지키는 것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계명 순종의 책임을 합리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으면 불순종의 죄를 아주 솜털처럼 가볍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하여금 ‘값싼 은혜’를 최고의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멀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떠나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 주중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탄의 공격과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말씀 가뭄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말씀 풍작’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자기 앞에 있으며 결코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시18:22).

 

다윗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데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21절) 자기 자신을 죄악에서 스스로 지키는데 헌신했습니다(23절).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므로 자기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습니다(박윤선, Delitzsch).  참으로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 이였습니다.  성경 잠언 16장6절 말씀처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에서 떠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 이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 그가 자기의 패역성을 늘 위험시하여 자신을 쳐 복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험시하여 경계한다”(박윤선).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일 먼저 위험시하므로 경계하고 있습니까?  위험대상 제1호가 내 자신인 것을 아는 신앙인이 과연 몇 명이 될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패역 성을 알고 경계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우리는 스스로 괜찮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 깊은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패역 성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죄를 범할 것을 뻔히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질까봐 두렵고 더 나아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조그마한 틈만 보여줘도 사자처럼 다가와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줄 알기에 항상 경계상태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주에 한 성도님과 함께 양로원에 방문했었습니다.  처음 뵙는 집사님이시지만 제가 함께 간 성도님의 친척 되시는 분이시기에 그저 기도한 다음에 찾아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지금 당뇨로 심장 수술과 더불어 다리 한쪽 무릎까지 절단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집사님 고백은 하나님의 징계로 다리까지 그렇게 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밖에는 없다’는 고백을 하실 때에 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리까지 절단되시면 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의 징계를 인정하시면서 주님 밖에 없으심을 고백하시니 이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므로 자신을 죄악에서 스스로 지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박윤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상 주심을 바라보므로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데 전심전력해야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균형적인 신앙생활을 배워나아 가면서)